
[특별기고] 금년 5월초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이 SNS에 올린 글이 화제였다.
김 실장은 이재명 대통령이 반복적으로 던졌던 “왜 가장 여유 있는 사람은 가장 낮은 금리를 누리고, 가장 절박한 사람은 가장 비싼 돈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언급하며, 이른바 ‘금융의 중간 지대’가 방치된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우량 고객과 고금리 시장 사이에서 중간 신용자들이 배제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금융 중간 지대’는 ‘보건의료의 방치된 중간 지대’를 떠올리는 일종의 평행이론같이 들린다.
김용범 실장이 제기한 문제 의식은 보건의료정책에도 거의 그대로 대입해 볼 수 있다. 그의 핵심 주장처럼 ‘은행이 품이 많이 드는 중간 신용자를 외면’ 하듯이 그동안 의료정책 역시 진정한 의료체계 변화를 끌어낼 품이 많이 드는 정밀한 개입은 적극적으로 회피해 왔다.
결국 금융에 던져진 질문은 보건의료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왜 가장 생명이 위급한 환자는 응급실을 전전하며 거리에 버려지고, 가벼운 증상을 가진 이들은 곳곳에 넘쳐나는 병원과 더 큰 병원을 아무렇지 않게 누리며 대한민국 의료 최고를 외치는가.”
“왜 가장 의료가 필요한 지방에는 병원이 포화상태라고 하고, 병원이 떼로 몰려있는 수도권에는 아직도 병원이 모자르고 의사들이 몰려가나.”
의사 개인과 병원 이기심이나 환자의 도덕적 해이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유도한다. 그런 관점에서 “금융이 왜 이렇게 잔인하냐”고 묻던 이재명 대통령 말처럼 “한국 의료는 왜 이토록 잔인한가”라고 되물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 의료 중간지대는 왜 무너졌나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가고, 보상(수가)이 높은 곳에 인력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의료 시장 A‧B‧C이자 흔들리지 않는 질서라고 모두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 질문은 그걸 몰라서 나온 질문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의료정책은 “도대체 누구를 지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이다.
정부는 수십 년간 잘 짜인 통계표와 그 안에 기입된 숫자로 의료체계를 지배했다. 복잡한 의료현장 생태계를 ‘행위별 수가’라는 가격표와 ‘의대 정원’이라는 앙상한 숫자로 압착해 왔다.
행위를 많이 할수록 보상하는 구조는 초기 의료인프라를 빠르게 확충하는 데 매우 합리적이고 잘 들어맞을 수 있다. 하지만 수가와 정원이라는 잣대는 김 실장이 비평하는 금융이 그러하듯 철저히 ‘평균과 효율’만 본다.
고위험 산모 생명을 살리는 밤샘 수술의 고단함이나, 10주 이상 중환자실을 벗어나지 못하는 단 한 생명의 가냘픈 숨을 들여다 보는 간호사들의 숭고함 같은 가혹한 변수들은 그 모델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기계적인 진료 횟수와 수술 건수, 근무시간만 절대적인 신이 돼 병원의 생사를 가르고 의사들 진로를 정한다.
시스템은 건강보험 재정의 효율화를 꾀할지 모르지만 그 정답을 위해 필수/지역의료 억울함은 기꺼이 희생된다. 시스템이 그들을 가성비가 떨어지는 집단으로 묶어버리기 때문이다.
의료시스템 파국, 철저히 수익성 위주의 시장 실패이자 이를 방치한 관료주의 산물
왜 가장 힘겹게 생명을 다루는 이들이 가장 무거운 적자와 소송의 짐을 져야 하는가. 이것은 단순한 정책 실패가 아니라 철저하게 설계된 구조의 문제다.
잘 드러나지 않고 일상에 파묻히면 그 구조를 읽기도 힘들지만 어쩌다 의료위기가 한 번 휩쓸고 간 자리엔 구조가 남기는 상처가 드러난다.
시스템을 뒤흔드는 파국은 언제나 관료들 탁상행정과 대형병원들의 무한경쟁이 임계치를 넘어설 때 시작된다.
코로나19 대응 실패도 그랬고 소아과 오픈런, 응급실 뺑뺑이, 지방의료 붕괴 등 실패들은 의사 개개인 일탈이 아니라 철저히 수익성 위주로 돌아가는 시장의 실패이자 이를 방치한 관료주의 산물이다.
하지만 이때도 마치 금융 외부의 소외당하는 개인이 그렇듯 구조적 실패 대가를 가장 가혹하게 치르는 건 역설적으로 가장 밑단의 지역주민과 필수의료 현장 노동자들이다.
위기가 닥쳐도 관료들은 근본적인 성찰 대신에 철저히 계산된 ‘회피 전략’을 택한다. 김 실장이 지적한 금융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현재의 보건의료정책도 가운데가 휑하게 뚫린 도넛과 같다.
이를테면 저위험‧저비용의 쉬운 정책, 즉 행정명령으로 의사들을 압박하거나, 건보재정 안에서 특정 수가만 찔끔 올렸다 내리는 방식이다.
기획재정부와 싸울 필요도 없고 관성대로 책상에서 생각하는 가장 쉽고 값싼 통제와 지역 네트워크에 대한 정밀한 분석 없이 정치적 명분만 앞세워 공공병원이나 의대 신설만 주장하고, 의대 정원을 수천 명 단번에 늘리는 식의 거친 정책이다.
이는 거대한 리스크를 감수하며 정치적 이득만 노리는 고위험‧고비용의 전형적인 포퓰리즘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가장 중요한 ‘중간 지대’는 버려진다. 지역의료 네트워크를 엮고, 필수의료 종사자의 위험을 분담하고, 공공의료 인프라를 적절한 기능과 역할로 배치하는 업무 등 여기에는 효과적인 예산집행과 고도의 전문적 분석, 치열한 현장 조율이라는 엄청난 품이 든다.
정부는 이 비용과 책임을 지기 싫어 ‘의료계 밥그릇 챙기기’라는 프레임 뒤에 숨어 낡은 대책을 재탕하며 직무 유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은행이 가성비가 안 맞는 중간 신용자를 내치듯이 보건복지부를 중심으로 그동안 의료체계는 찌그러진 의료시장을 정밀하게 고치는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을 포기해 왔다.
선택지를 박탈당한 환자들은 KTX를 타고 서울 대형병원으로 몰려들었고 그 결과 지역 2차병원 역량은 고갈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건 우연이 아니라 정책의 나태함이 만들어낸 치밀하게 방치된 모순이라고 하는 것이다.
의료혁신보다 먼저 필요한 거버넌스 혁신
의료혁신은 여기서부터 논의돼야 한다. 그래서 거버넌스 혁신이라는 ‘운영체제(OS)’ 변화를 주장했던 것이다.
수가 인상, 의대 증원, AI 도입 같은 혁신(애플리케이션)들은 결국 비용만 쓰고 또 다른 오작동을 낳고 기득권을 강화하는 도구로 전락할 뿐이다.
거버넌스 논의에서 세 가지 원칙을 지켜야 한다. 첫째, 정책을 다루는 최상위 룰(Rule)을 관료만의 손에서 독립시켜야 한다.
관성적인 복지부 체제로는 안된다. 그래서 단기적 예산 논리와 행정 편의주의에서 완전히 독립된 ‘새로운 거버넌스 기구’를 보건의료정책을 위한 ‘중앙은행’ 처럼 세워야 한다.
이 위원회가 의료체계 구조를 들여다보고, 정밀한 가치 측정을 통해 국가적 자원 배분과 수가의 큰 방향을 강제로 설정할 수 있도록 권력 구조를 재편해야 한다.
둘째로 방치된 시장, 실패한 시장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무기(수단)를 내놓아야 한다.
기존 국립중앙의료원 수준을 보건복지부 사무관이 다루는 힘없는 조직이 아니라 새 기구 의료정책을 관료행정으로부터 자율성을 가지고 이끌 수 있는 ‘국립의료공단’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필요한 이유다.
이들이 독자적인 보건안보 예산과 파격적 인사권(국립의전원 포함)을 무기로, 필수의료 가치를 세우고 직접 그 생태계를 재건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의사결정 권한을 중앙 독점에서 지역과 시민으로 이양하는 방향과 가치를 분명히 정해야 한다. 의료정책 주어는 ‘정부’나 ‘의사’가 아니라 ‘국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획일적인 서울의 수가 코드에서 벗어나 지자체와 지역 주민, 환자가 직접 참여해 자신들 지역에 맞는 특화된 의료 네트워크를 자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도록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공하고 이를 관리할 수 있는 수단을 포함해 실질적인 권한과 재정을 이양하는 ‘민주적 거버넌스’를 확장해야 한다.
‘의료혁신’은 ‘의료개혁’이 가능하게 하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국민 모두의 의료를 위한 시작은 세세하게 정부가 놓친 어느 구석을 찾아서 돈을 더 풀거나 사람을 더 배치하는 수준에서 머물면 안된다. 반복되는 위기를 통제할 ‘결정의 권력’인 거버넌스부터 새롭게 구성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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