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데이터 시대, 의료기기산업 신뢰 경쟁력”
박성용 한국산업기술시험원 본부장
2026.05.22 17:34 댓글쓰기

[특별기고]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건강한 삶’에 대한 패러다임이 거대한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과거의 의료가 발병 후 ‘치료’에 집중했다면, 현대 의료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질병을 조기에 예측하고 진단하는 ‘예방’ 중심의 시대로 무게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이런 헬스케어산업의 인공지능 전환(AX)은 단순한 기술의 진보가 아닌, 대한민국 경제의 신성장동력이자 국민 건강을 지키는 핵심 아이템으로 부상하고 있다.


고속 성장하는 글로벌 시장과 우리의 현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글로벌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은 2020년 1,525억 달러에서 2027년 5,088억 달러 규모로 연평균 18.8% 고속 성장할 전망이다. 이미 시장에서는 AI 기술을 적용하지 않은 디지털 의료제품은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의료 AI는 선택이 아닌 기업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됐다.


국내 의료기기 시장 또한 8조 원 규모로 성장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인 4조3,000억원이 수출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장밋빛 전망 이면에는 냉혹한 현실이 존재한다.


세계 시장은 이미 소수의 글로벌 거대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의료기기 특유의 복잡한 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면 진입 장벽을 넘기 어렵다. 특히 우리 기업들이 겪는 가장 큰 고충은 제품 개발 후 맞닥뜨리는 ‘규제의 벽’이다.


데이터 경쟁력과 인프라, 수출길을 여는 열쇠


의료 AI의 경쟁력은 결국 ‘데이터’에서 나온다. 고품질 데이터를 확보하고 이를 알고리즘 개발에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느냐가 승패를 가른다.


이를 위해 한국산업기술시험원(KTL)은 대구광역시에 ‘의료인공지능개발지원센터’를 구축하고, 보건의료데이터 활용 가이드라인에 맞춘 50만 건 이상의 고품질 의료 데이터를 확보해 기업들을 지원하고 있다.


단순히 데이터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전문 시험평가 시설을 통해 AI 의료기기의 성능과 안전성을 선제적으로 검증하는 인프라를 갖췄다. 이런 ‘의료 AI 시험 인프라’는 우리 기업들이 해외 시장에 진출할 때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것이다.


설계 단계부터 규제를 내재화하는 전략


최근 정부는 디지털 헬스케어산업 육성을 위해 ‘디지털의료제품법’을 시행하고 ‘선 진입, 후 평가’ 제도를 도입하는 등 파격적인 규제 혁신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기업의 신속한 시장 진입을 돕는 획기적인 조치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리면 규제 환경은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미국 식품의약청(FDA)은 제품의 전체 수명 주기를 관리하는 ‘전체 제품 수명주기(TPLC)’ 모델과 ‘사전 변경 관리 계획(PCCP)’을 도입했고, 유럽연합(EU)은 ‘인공지능법(AI Act)’을 통해 의료 AI에 대한 이중 규제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각국의 규제 요건이 복잡해질수록, 제품 개발의 마지막 단계에서 인증을 고민해서는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다.


이제 필요한 것은 기획 단계부터 규제 요구사항을 설계에 반영하는 ‘Design-by-Compliance(준법 설계)’ 전략이다. KTL은 국제의료기기 안전 규격(IEC 60601-1 3.1판)과 같은 최신 국제 표준을 기반으로 소프트웨어 검증(V&V) 및 사이버 보안 시험 서비스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기업들이 개발 초기부터 글로벌 표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밀착 지원하고 있다.


한계를 넘는 시험 엔지니어링, 그 의미


최근 국내에 도입된 중입자 치료기의 시험 성적서 발급은 대한민국 시험인증 역량을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중입자 치료기는 암세포만을 집중적으로 파괴하는 첨단 방사선 치료 장비로, ‘꿈의 암 치료기’로 불릴 만큼 높은 정밀도와 안전성이 요구된다.


일본 등 기술 선진국조차 최신 규격(IEC 60601-1 3.1판) 적용에 난항을 겪는 상황에서, KTL은 기기의 사용목적에 집중하고 제조사와의 긴밀한 시험 엔지니어링 협력을 통해 중입자 치료기 국내 도입의 길을 열었다.


복잡한 전원 계통과 절연 구조를 분석하며 밤을 지새운 노력은 암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는 결실로 돌아왔다. 이 과정에서 확인한 것은 분명하다. 대한민국이 의료기기 국제 표준에 대한 철학과 이해도 면에서 글로벌 선도 기업을 이끌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췄다는 점이다.


한국 토종 시험 브랜드의 사명


의료기기 시험검사는 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작을지 모르나, 결핍될 경우 국민의 안전과 건강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필수 요소다. 마치 우리 몸의 ‘비타민’과 같다.


1966년 우리 정부와 유네스코의 합작으로 설립돼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은 KTL은 국내 유일의 공공 시험인증기관이다. 한국 토종 시험 브랜드로서, 기업들이 어려워하는 길을 함께 가는 것을 존재의 이유이자 사명으로 삼고 있다.


의료기기산업은 이제 단순한 제조업을 넘어 AI와 데이터가 결합된 첨단 서비스 산업으로 진화하고 있다. 규제는 더 이상 혁신의 걸림돌이 아닌, 제품의 신뢰성을 보장하고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는 디딤돌이 돼야 한다.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미래 경제를 견인하는 의료기기산업의 도약과 성장 여정에서 우리 모두의 지혜와 열정을 모아야 할 때다. KTL도 지난 60년간 축적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바이오헬스 강국으로 거듭나는 그날까지 우리 기업들의 든든한 파트너로서 수출길 개척의 최전선에 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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