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의료 매우 성급해 미래 재앙 초래할수도"
박정율 세계의사회 차기회장, 국제사회 '시각·우려감' 전달
2026.02.20 05:29 댓글쓰기

극으로 치닫던 의정사태가 천신만고 끝에 타협점을 찾아가고 있던 지난해 10월 대한민국 의료계에 낭보가 전해졌다. 세계의사회(WMA, World Medical Association) 차기 회장에 대한의사협회 박정율 국제협력위원장이 이사회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술기는 물론 위상에서도 전세계 의료인들 추앙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의료의 새로운 역사라는 평가가 이어졌다. 하지만 그는 마냥 기쁨을 표출할 수 없었다. 한국의료가 처한 상황이 너무나 엄중했기에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당선 직후 쇄도하는 언론 인터뷰를 모두 고사한 이유이기도 했다. 신중한 행보를 이어오던 그가 최근 대한의사협회 출입기자단과 간담회를 갖고 조심스레 작금의 한국의료 상황을 진단하고 오는 10월 세계의사회장 취임 이후 구상 중인 로드맵을 공개했다.


- 세계의사회 차기 회장 선출 의미는


정말 영광스럽고 감사한 마음이지만 한국의료 상황을 감안하면 기쁨보다는 책임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번 선출은 개인의 영예라기보다 그동안 우리나라 의사들이 국제사회에서 해 온 역할과 노력이 함께 인정받은 결과다. 대한의사협회는 1949년 세계의사회에 가입한 이후 적극 활동하며, 세계의사회 운영과 주요 논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특히 1985년에는 고(故) 문태준 회장이 세계의사회 회장으로 취임하며 한국의료의 국제적 위상을 크게 높인 바 있다. 이번 선출은 한국의료가 겪고 있는 현실과 고민이 더 이상 국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와 함께 논의하고 지혜를 모아야 할 사안임을 보여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의 다양한 시각과 연대를 통해 한국의료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세계의사회장으로서 각국 의료계와 긴밀히 협력해 글로벌 보건의료 과제에 대응하면서 한국의료가 안고 있는 현안과 문제 역시 국제사회에 정확하게 전달하겠다. 이를 통해 한국의료가 지속 가능한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국제적인 공감을 이끌어 내겠다.


- 세계의사회의 구체적 역할은


세계의사회는 전 세계 1100만명 이상 의사를 대표하는 각국 의사협회의 국제연합체다. 의료와 윤리, 의학교육은 물론 건강과 관련된 인권 전반에 걸쳐 가능한 최선의 국제적 기준을 제시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전문가적 자율성과 외부 영향을 받지 않은 독립적 임상 진료를 보장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미션으로 정하고 있다. 이렇게 마련된 기준들은 각국의 의료 정책과 제도, 실제 임상 현장에서 중요한 준거로 활용되고 있다. 현재 118개국 의사회가 가입해 있다. 매년 20~30개의 주요 의료정책을 개발하고, 그 중요도와 시급성에 따라 성명서, 결의안, 선언문 등으로 구분해 발표한다. 이러한 문서들은 국제적으로 합의된 의사사회의 공식 입장으로, 각 회원국의 의료정책에 반영되는 기준으로 활용된다.


- 현재 세계의사회에서 한국의료 위상은


118개 회원국이 함께하는 세계의사회에서 한국의료는 단순히 지역 대표성을 넘어 실제 논의의 방향과 내용에 기여하는 국가로 인식되고 있다. 외국에서 바라보는 한국의료는  ‘K-medicine’이라는 이름으로 전문성과 신뢰와 함께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처음 세계의사회 회의에 참석했을 때부터 이미 한국의료 위상과 역량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을 체감할 수 있었고, 이러한 평가와 신뢰가 있었기에 더 큰 책임감을 갖고 세계의사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특히 대한민국은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의료 인프라와 의료 수준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과거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다른 국가를 지원하는 위치로 전환한 매우 드문 사례다. 이러한 경험은 서구권 중심의 의료계 리더들에게도 인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세계의사회가 우리나라 의료제도에 영향을 미친 사례가 있었나


물론이다. 지난 2005년 황우석 사태 이후 생명윤리법 정비 과정이 대표적이다. 줄기세포 연구 과정에서 난자 기증의 윤리성 문제가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됐을 당시 한국 정부와 학계가 사실상 유일한 ‘절대 기준’으로 삼았던 게 세계의사회의 ‘헬싱키 선언’이었다.


2008년 세계의사회 서울 총회에서 채택된 ‘의료 전문가 자율성에 관한 서울 선언’은 한국 의료계에 실질적인 기준과 논리를 제공했다. 이 선언은 정부 주도의 의료정책 도입시 의료계가 단순한 이해관계자가 아니라 국제적으로 합의된 원칙에 근거해 대응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2017년 총회에서 개정된 ‘제네바 선언’이 국내 의사윤리강령에 즉각 반영된 사례도 대표적이다. 당시 개정된 제네바 선언에는 의사의 의무로서 환자뿐 아니라 의사 본인의 건강과 자기 관리에 대한 조항이 새롭게 포함됐다.


- 임기 동안 꼭 이루고 싶은 핵심 과제는 무엇인가


세계의사회 회장직은 매우 영광스러운 자리이지만 동시에 특정 국가 이해관계나 국내 현안에만 치우칠 수 없는 위치이기도 하다. 전 세계 의료계 공통가치와 원칙을 대표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그에 따른 책임과 부담 역시 크다. 그럼에도 의사들의 전문적 자율성과 독립성 확립은 반드시 의미 있는 성과를 남기고 싶은 핵심 과제다.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이미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이 가치가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아직 충분히 구현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세계의사회 회장으로서 모든 회원국 의사들이 정치적·행정적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전문성과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힘을 쏟고자 한다. 이는 결국 환자들 건강과 삶의 질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키는 기반이 된다고 믿는다.


- 한국정부 의료정책이 국제기준에 부합한다고 보나


적정 의사 수 확보와 배출 문제는 한국은 물론 여러 선진국에서도 공통적으로 고민하고 있는 명제다. 다만 증원에 전제돼야 하는 것은 국제적 인증에 부합하는 의료인을 양성할 수 있는 교육 및 수련 인프라가 갖춰져 있느냐 하는 부분이다. 즉, 의과대학 교육과 수련기관 질(質)과 시스템, 이를 평가하고 지속적으로 관리·감독할 수 있는 체계가 선행되고 지속적으로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후 순차적으로 증원해야 한다. 그래야 환자안전을 지킬 수 있고, 의료 질(質) 저하를 막을 수 있다. 의료의 질적 하락은 증원 그 자체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이며, 한 번 무너지면 단기간에 회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아울러 급격한 증원으로 인한 교육시스템 붕괴는 환자안전 위협과 의료비 상승으로 이어지고, 이에 대비하지 않으면 미래에 재앙이 될 수 있다.


“국제사회 공조 통한 한국의료 문제 해결 모색”

“환자안전-의사권리, 이분법적 접근 경계”

“의사 번아웃 방치하면 장기적으로 국민건강 지속 가능성 상실”


- 최근 발표된 의과대학 증원 규모 및 방식에 대해 평가한다면


충분한 준비와 검증 없이 의사인력 양성 확대가 시행될 경우 의학교육 질과 환자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신중한 접근과 장기간의 숙고와 성찰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 결정에 이러한 고민이 투영돼 있지 않은 것 같아 우려스럽다. 단순히 인력을 늘리는 것에 매몰되기 보다 최대한 과학적인 방법으로 모든 주요 변수들을 반영하는 방식을 통해 수요를 추계해야 한다. 또한 그에 걸맞은 교육환경과 질적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는 게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무리한 제도 운영 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전반적인 의료전달체계 시스템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논의, 이를 바탕으로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준비가 선행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의료정책이 가능해질 것이다.


- 의정사태에서 세계의사회는 한국 의사들을 지지하는 성명을 냈다


세계의사회 지지는 특정집단 이익을 위한 집단행동 자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의료정책 결정 과정에서 전문가 자율성이 보장돼야 하며, 의사 또한 기본적 권리를 가진 주체라는 보편적 원칙을 강조하는 메시지다. 전공의들 단체행동을 '환자안전 대(對) 의사권리'라는 이분법적 대립으로만 봐서는 곤란하다. 의사가 과학적 근거와 전문적 판단에 따라 소신 있게 진료할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될 때 환자안전과 의료 질도 담보할 수 있다. 이 두 가치는 충돌이 아닌 상호 보완적 관계다. 세계의사회는 어느 국가에서든 의사가 합법적 절차와 윤리적 기준을 지키면서 의료환경과 근무조건 개선을 요구할 권리가 있음을 강조해 왔다. 이러한 권리는 단기적인 법적 평가를 넘어 장기적으로 환자와 사회 전체 이익과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 의사들의 ‘번아웃’ 문제에 대한 견해는


의료진의 과도한 희생과 극심한 노동 강도에 의존해 유지되고 있는 상황은 단기적으로 의료 공백을 막는 효과가 있을 수는 있지만 의료진 번아웃과 건강 악화를 구조적으로 방치한다는 점에서 환자안전과 의료의 질을 동시에 위협하는 매우 취약한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사회 ‘제네바 선언’을 통해 의사의 건강권이 환자안전 전제조건임을 분명히 했다. 지난해 채택된 성명서에서도 의사의 신체적·정신적·사회적 웰빙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환자 치료 질과 공공 신뢰에 직결되는 핵심 요소임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충분한 인력·제도적 보완 없이 기존 의료진에게 업무를 전가하는 ‘갈아 넣기식’ 대응은 국제기준과 거리가 멀다. 의사 번아웃을 방치하는 정책은 결코 환자 중심적일 수 없다. 당장의 단기적 희생을 강요하는 방식이 아닌 국제기준에 부합하는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 한국 젊은의사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시각은


최근 적잖은 의대생과 전공의들이 해외 진출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 자체는 평상시라면 개인의 경력 확장과 국제적 교류라는 측면에서 환영할 일이지만 그 배경이 의료대란이라는 점에서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한국에서 의업(醫業)을 수행하기 어려워 회피하듯 해외로 진출하는 것 외에 국제무대에서의 활동은 적극 독려해야 한다. 이미 전 세계 젊은의사들은 매우 적극적으로 세계의사회 등에 활동하고 있다. 국제적 인맥과 신뢰 관계를 통해 국제무대에 훨씬 수월하게 적응하고, 더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세계의사회는 준회원 제도가 있어 개인이 회비 부담 없이 가입해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거나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구조다.


- 세계의사회 차기 회장으로서 14만 한국 의사들과 한국 정부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먼저 14만 의사들에게 예상치 못한 거센 풍랑 속에서도 전문가적 역량과 양심을 지키기 위한 헌신과 고귀한 노력을 전 세계 의료 공동체와 함께 지켜보고 있으며, 깊은 존경과 연대의 마음을 전한다. 국가 의료정책 수립은 ‘생명’ 영역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존중돼야 한다. 전문가 목소리를 경청하고 자율성과 임상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 의료체계의 지속과 발전 가능성을 담보하는 유일한 길이다. 결국 의료 본질은 환자와 의사 사이 '신뢰'에 있다. 정부와 의료계가 상호 존중을 통해 이 신뢰를 회복할 때 한국의료는 다시금 세계 정점에서 빛날 것이다. 그 여정에 세계의사회가 늘 함께 하겠다


한편, 박정율 세계의사회 의장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으로 1996년부터 30년 넘게 고려대학교의료원에서 신경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대안산병원 진료부원장을 역임했으며 대한의사협회 부회장 및 대한의학회 부회장을 맡아 국내 의료 발전에 기여해 왔다.


특히 세계의사회 의장, 재정‧기획위원장, 세계의학교육학회 WDMS 한국대표 등을 역임하며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세계의사회 회장 공식 임기는 오는 2026년 10월부터 2027년 10월까지 1년이다. 그에 앞서 차기 회장으로 1년, 이후 직전 회장으로 1년을 포함해 총 3년간 WMA 회장으로 공식 활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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