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신속등재 취지 공감…‘약가·사후평가’ 과제
학계 “비싼 약가 보장 제도로 전락 우려, 평가 생략 아닌 절차 효율화가 핵심”
2026.05.28 06:17 댓글쓰기

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등재 기간을 현행 240일에서 100일로 대폭 단축하는 이른바 ‘패스트트랙’ 시범사업이 첫 발을 내디뎠지만 가시밭길이 예고됐다. 


환자 생명권 보장이라는 거시적 명분에는 모두가 공감했지만, 세부 방법론을 두고는 학계와 산업계, 환자단체가 뚜렷한 시각차를 드러내며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했다.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27일 공청회를 열고 ‘선(先) 등재 후(後) 평가’를 골자로 한 신속등재 제도 밑그림을 공개했다. 


임상적 유용성을 우선 검토해서 등재를 앞당기는 대신, 향후 5년간 축적된 실사용 데이터(RWE)를 바탕으로 경제성을 재평가해 약가를 조정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토론에 나선 학계 전문가들은 평가 절차 간소화가 자칫 제약사에 과도한 혜택을 줄 수 있다는 우려를 피력했다.


배은영 경상대 약학대학 교수는 “신속 등재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제시된 방법론이 적절한지는 강한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배 교수는 “외국 조정 최저가 90% 수준에서 약가를 선계약하는 것은 사실상 5년동안 제약사에 높은 약가를 보장해 주는 셈”이라며 “등재 속도를 높이기 위해 도려내야 할 것은 평가 내용 자체가 아니라 불필요하게 지연되는 행정 절차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조민우 울산대학교 예방의학교실 교수 역시 공적 자원 투입에 대한 엄격한 잣대를 요구했다. 


조 교수는 “경제성 평가는 제약사를 괴롭히려는 허들이 아니라 해당 신약에 적절한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라며 “환자의 생명이 경각에 달린 만큼 빠른 등재가 필요하지만, 효과와 부작용이 명확히 검증되지 않은 약에 국민 돈으로 임상시험을 지원하는 꼴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한국형 사후평가 모델 신약 도입 장벽 ‘우려’


반면 제약업계는 글로벌 약가 책정의 냉혹한 현실을 언급하며, 한국형 사후평가 모델이 오히려 신약 도입 장벽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펼쳤다.


정재호 한국노바티스 전무(한국글로벌의약산업협회)는 “A8(선진 8개국) 중 3개국 이상에 등재된 약제를 조건으로 삼는다면, 미국 허가 직후 한국에 약을 들여오려는 제약사들은 오히려 타국 등재를 기다리며 진입을 늦춰야 하는 모순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정 전무는 “미국 최혜국대우(MFN) 조항 등으로 글로벌 제약사들이 약가 공개에 극도로 예민한 상황에서, 전체 글로벌 매출의 1%도 안 되는 한국 시장을 위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사후 임상을 진행하고 약가 인하 리스크까지 감수할 회사가 과연 있을지 우려된다”고 덧붙였다. 


제도 실효성을 담보하려면 글로벌 다이내믹스를 반영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행정적, 경제적 득실 논쟁 속에서 환자단체는 정작 제도 중심이 돼야 할 ‘환자’가 소외됐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정진향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사무총장은 “정부 발표 자료 글자 수를 세어봤지만, ‘환자’라는 단어는 행정적 수치나 관용구에 불과했을 뿐 환자의 진짜 목소리를 듣겠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 총장은 “환자들은 완벽한 행정 제도가 아니라, 당장 내일 숨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쓸 수 있는 ‘치료제’를 원한다”며 “제발 환자가 죽기 전에 약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정부는 쏟아진 우려와 비판에 대해 무거운 책임감을 표하며, 각계 목소리를 반영해 제도를 정교하게 보완하겠다고 약속했다.


강준혁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장은 “단순히 100일이라는 숫자상 목표에 매몰되지 않겠다”며 “사후 관리를 강조한 것은 사전 진입 장벽을 낮춘 데 따른 불가피한 책임 확보 차원”이라고 밝혔다. 


이어 “기존 치료 환자에 대한 보호 방안을 마련하고, 건보 재정 지속 가능성과 환자 생명권이 공존할 수 있도록 시범사업 추진 과정에서 투명하게 의견을 수렴해 나가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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