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코로나19 백신 접종 과정에서 이미 사용한 빈 주사기를 새 주사기로 착각해 다른 환자에게 다시 사용한 의사에게 면허정지 처분을 내리는 것은 적법하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고의가 아닌 실수에 대해서는 의사 개인에게 면허정지까지 할 수 없다고 본 1심이 뒤집힌 가운데 대한의사협회는 자발적인 사고 보고와 환자안전 문화가 위축될 수 있다며 우려를 표명했다.
10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등법원 제10-1행정부(재판장 오현규)는 지난달 21일 의사 A씨가 보건복지부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의사면허 자격정지처분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원고 승소한 1심을 취소하고 A씨 청구를 기각했다.
A씨는 지난 2021년 6월 2일 코로나19 백신 접종 중 앞선 환자에게 사용한 빈 주사기를 새 주사기로 착각해 다음 환자 팔에 다시 사용했다. 당시 주사기에는 약액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의협에 따르면 A씨는 사고 사실을 환자안전법상 자율보고 절차에 따라 스스로 보고했다. 잘못을 인지한 후 환자에게 사실을 알리고 검사와 재접종 등 후속조치도 시행했다.
복지부는 같은 해 9월 해당 행위가 의료법상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 금지 의무를 위반했다며 면허 자격정지 6개월 처분을 사전통지했다.
A씨가 의무위반 정도에 비해 제재가 과도하다는 의견을 제출하자 보건의료인 행정처분심의위원회는 스스로 실수를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배상해 합의한 점 등을 고려해 절반으로 감경할 것을 권고했다. 이에 복지부는 2024년 7월 면허 자격정지 3개월 처분을 내렸다.
그러나 A씨는 고의가 아닌 단순 실수인 만큼 면허정지 규정을 적용할 수 없다며 소송을 냈다.
1심 “경미한 과실”…항소심은 면허정지 인정
1심 서울행정법원은 A씨 손을 들어줬다. 1심 재판부는 일회용 의료기기 재사용에 대해 의료기관 개설자에게 시정명령 등 제재를 하는 것은 고의와 과실 모두 가능하지만, 의료인 개인에 대한 면허정지는 고의적인 재사용에 한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짧은 시간 내 다수 환자에게 예방접종을 실시하다가 과로 등으로 인한 주의력 저하로 이미 사용한 빈 주사기를 새 주사기로 착각해 다음 환자에게 사용한 경우로 보인다”며 “경미한 과실로 발생한 1회적 위반행위”라고 밝혔다.
이 같은 법리와 사건 경위를 종합해 재판부는 과실에 의한 재사용은 의료기관에 대한 시정명령으로 규율할 수 있는 만큼 A씨 개인에게 면허 자격정지 3개월을 부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러나 항소심은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에 따른 면허정지 규정이 고의뿐 아니라 과실로 재사용한 경우에도 적용된다고 판단했다.
의료법상 재사용 금지 규정에는 위반자의 주관적 인식이나 의사를 별도 요건으로 두고 있지 않고, 주사기 재사용에 따른 감염 위험 역시 고의와 과실 여부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유다.
재판부는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이 초래할 수 있는 감염 등 건강·보건상 위해가 작지 않고, 그 위험은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이 고의로 이뤄졌는지 또는 과실에 의한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과실에 의한 재사용을 면허정지 대상에서 제외할 경우 의료인 개인에 대한 공적 규제에 공백이 생길 수 있다고 봤다.
재판부는 “과실에 의한 행위라는 이유로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에 대한 공적 규제를 배제한다면 의료인의 해이를 유발할 우려가 있다”고 판시했다.
의협 “자율보고 이행했는데 앞으로 위축 우려”
항소심에서는 이미 사용한 주사기에 약액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에도 의료법상 재사용에 해당하는지도 쟁점이 됐다.
A씨는 약액이 남아 있지 않은 주사기를 다른 환자에게 다시 사용한 행위는 의료법이 금지하는 재사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한 환자에게 사용해야 하는 일회용 주사기를 두 환자에게 순차적으로 사용했다면 재사용에 해당하며 주사기에 약액이 남아 있었는지는 판단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봤다.
실제 감염 등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점도 처분을 취소할 사유는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해 환자에게 감염 등 건강상 위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이는 우연한 결과일 뿐”이라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건강·보건상 위해가 발생하지 않았다고 이번 사건을 가볍게 취급할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한편 의협은 10일 정례브리핑을 통해 이번 판결에 우려를 표했다.
의협은 “순간적인 착오로 발생한 사고에 대해 자율보고까지 이행한 경우에도 이러한 사정이 충분히 고려되지 않는다면, 의료현장의 자발적인 사고 보고와 환자안전 문화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고의적·반복적인 위반행위와 의료현장에서 의도치 않게 발생하는 실수나 착오가 합리적으로 구분될 수 있도록 적극 대응하고, 의료인의 자발적인 사고 보고와 환자 보호를 위한 조치가 충분히 고려되는 방향으로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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