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보건의료계가 다시 한번 세계보건기구(WHO) 수장 배출에 도전장을 던질 수 있을까.
대한의사협회와 대한치과의사협회, 대한한의사협회, 대한약사회, 대한간호협회 등 국내 보건의약 5개 단체가 한목소리로 정부에 차지호 의원의 WHO 사무총장 후보 지명을 촉구했다.
의사와 치과의사, 한의사, 약사, 간호사 등 국내 보건의료계를 대표하는 5개 단체가 특정 인물을 WHO 사무총장 후보로 공식 지지하고 정부의 결단을 촉구한 것은 이례적인 행보다.
무엇보다 20년 전 WHO 사무총장을 지낸 고(故) 이종욱 박사가 임기 중 별세한 이후 한국은 다시 한 번 WHO 수장 자리에 도전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크게 내지 못했다.
이번 공동성명은 단순히 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넘어 한국 보건의료 위상이 높아진 지금이 국제보건 리더십에 도전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료계의 공통된 시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세계 보건의료 향한 한국의 책임론
5개 단체는 공동성명은 한국의 변화에 주목했다. 과거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보건의료의 경험과 기술을 다른 국가들과 나누는 국가로 성장했다는 것이다.
특히 국민건강보험을 비롯한 한국의 보건의료 체계와 코로나19 대응 경험, 높은 수준의 보건의료 인력 등을 국제사회와 공유해야 할 시점이라고 평가했다.
이들 단체는 “감염병은 국경에서 멈추지 않고 기후로 인한 건강 피해 역시 마찬가지”라며 “세계 어느 곳에서든 보건체계가 무너지면 그 여파는 결국 한국에도 미친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국 보건의료가 이제 세계가 짊어진 몫을 나눠 질 때가 됐다”며 “이는 받은 것을 돌려주는 일이면서 동시에 국민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WHO가 처한 현실도 구체적으로 짚었다. WHO가 재정 여건 악화로 조직과 인력을 축소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한 상황에서 공중보건 위기는 언제든 다시 발생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감염병의 조기 발견과 정보 공유, 국가 간 공조의 중요성이 확인된 만큼 WHO의 역할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는 판단이다.
기후위기 역시 이제 환경 문제가 아닌 보건의료 문제로 다뤄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폭염으로 인한 건강 피해와 감염병 매개체의 서식 범위 변화, 자연재해와 강제이주 등 기후변화가 이미 전 세계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공지능 역시 새로운 글로벌 보건 의제로 꼽혔다.
AI가 의료의 교육과 진료 환경을 빠르게 바꾸고 있지만 기술 접근성에 따라 의료기관과 환자 사이에 새로운 건강 격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다.
결국 새로운 WHO 수장에게는 전통적인 감염병 대응 역량을 넘어 재정위기와 기후위기, AI 등 새로운 글로벌 의제를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게 5개 단체의 판단이다.
“현장·연구·정책 역량 갖춘 적임자”
5개 단체는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로 차지호 의원을 지목했다. 차 의원은 의과대학 졸업 후 하나원에서 약 3년간 북한이탈주민 약 4천 명을 진료했다.
이후 중국과 북한 국경 지역에서 국경없는의사회(MSF)와 함께 의료활동을 펼쳤으며, 지진과 전쟁 등 인도주의적 위기가 발생한 지역을 중심으로 국제보건 활동을 이어왔다.
그는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강제이주학을, 미국 존스홉킨스대학에서 국제보건학을 공부하며 현장 경험을 학문적 연구로 확장했다.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는 인도적 위기 대응을 가르쳤고 국경없는의사회 운영본부가 함께 만든 지도자 교육 과정에도 참여했다.
최근에는 KAIST에서 의료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등 글로벌 보건의 새로운 의제로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5개 단체는 특히 차 의원이 현장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연구를 통해 근거를 만들며, 이를 정책으로 연결하는 경험을 모두 갖춘 인물이라는 점을 가장 큰 강점으로 꼽았다.
이들 단체는 “현장만 아는 사람도, 연구만 아는 사람도 지금의 WHO를 감당하기 어렵다”며 “현장 경험과 연구 역량, 정책 실행력을 두루 갖춘 차 의원이 적임자”라고 밝혔다.
한국인 WHO 사무총장 도전이라는 점에서도 이번 움직임은 상징성이 크다.
한국은 지난 2003년 고 이종욱 박사를 WHO 사무총장으로 배출하며 국제보건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하지만 이 전 사무총장은 임기 중인 2006년 갑작스럽게 별세했고, 이후 한국은 WHO 수장 자리에 다시 도전할 기회를 사실상 만들지 못했다.
이들 단체는 “20년 전 우리는 세계보건기구를 이끌던 한국인 의사를 잃었다”며 “그분이 임기 중 세상을 떠난 뒤 우리는 그 자리를 다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고 밝혔다.
이어 “한국 보건의료는 지난 반세기 동안 국민의 신뢰로 성장했다”며 “이제 그 힘을 세계와 나눌 때”라고 덧붙였다.
이번 후보 지명 요구가 단순한 인물 추천을 넘어 故 이종욱 사무총장 이후 멈춰 있던 한국의 글로벌 보건 리더십 도전을 다시 시작하자는 선언으로 해석되는 이유다.
관건은 정부 선택…후보 마감, 9월 24일
다만 차지호 의원이 실제 WHO 사무총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후보 지명이 필요하다.
WHO 사무총장 후보는 개인이 직접 출마하는 방식이 아니라 회원국 정부의 추천을 통해서만 후보로 등록할 수 있다. 후보 제출 마감일은 오는 9월 24일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점도 변수다. 정부가 후보를 지명하더라도 이후 국제사회에 후보의 비전과 역량을 알리고 각국의 지지를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 하반기에는 WHO 각 지역 회원국이 참여하는 지역위원회가 잇따라 예정돼 있어 정부의 신속한 결정 여부가 향후 국제적 지지 기반 확보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들 단체는 “후보 지명이 늦어질수록 국제사회에 비전과 역량을 알리고 회원국의 이해와 지지를 구할 시간도 줄어든다”며 조속한 정부의 결단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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