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생님, 오늘 보건지소 문 열었습니까.” 섬마을과 산간 오지에서 흔히 들리던 이 물음은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일상이 됐다. 의료기관은 보건지소가 유일한 지역에서 의사를 만나는 일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지역주민 건강을 지켜온 공중보건의사(공보의)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보건지소는 문을 닫았고, 일부 지역은 순회 진료로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의료 붕괴’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라는 말이 현장에서 나온다. 대한민국 지역의료를 지탱해온 최후의 보루였던 공보의 제도는 지금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올해 공보의 지원율은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의대생과 젊은 의사들 사이에서는 “공보의를 가느니 현역으로 빨리 다녀오는 것이 낫다”는 인식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현역 복무기간이 18개월인 반면 공보의 복무 기간은 37개월에 달하는 기형적인 구조가 기피 현상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된다. 여기에 의대 정원 증원 정책을 둘러싼 의정 갈등과 의료계 혼란까지 겹치면서 현역 입대를 선택하는 흐름이 현실화되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처우 개선과 순회 진료 확대 등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현장의 반응은 냉담하다. 월급 인상이나 단기 보완책만으로는 이미 등을 돌린 젊은 의사들 선택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오히려 지금의 상황은 그동안 저비용 인력에 의존해 의료 취약지를 유지해 온 ‘공보의 중심 지역의료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낸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공보의 급감은 단순한 인력 부족 문제가 아니다. 의료 접근성 악화는 곧 지역 주민의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며, 장기적으로는 지방 소멸을 가속화할 수 있는 중대한 사회적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 공보의가 사라지는 시대를 맞아 정부가 어떤 대안을 준비하고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다. 데일리메디는 소위 ‘씨가 마르고 있다’는 공보의 수급 위기 실태를 심층적으로 진단한다. [편집자주]
농어촌 의료 최전선을 지탱해 온 공중보건의사(공보의) 제도가 도입 46년 만에 존폐 기로에 섰다.
과거 의대 졸업생들에게 당연한 선택지 중 하나였던 공보의 입대는 이제 ‘인생 낭비’ 혹은 ‘피해야 할 굴레’로 전락했다.
올 공보의 지원자 역대 최저, 전국 보건소·보건지소 진료 기능 상실 예고
이러한 인식 변화는 단순한 정서적 거부감을 넘어 통계로 증명되고 있으며, 최근 신규 임용되는 의과 공보의 수는 역대 최저치를 매년 경신하면서 전국 보건소와 보건지소 진료 기능 마비로 이어지는 실정이다.
실제로 지난 3월 17일 국회에서 서영석 의원 주최로 열린 ‘군의관·공보의 확충 정책토론회’에서는 이러한 위기 상황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토론회에 참석한 대한의사협회 김택우 의장은 과거 3000여 명에 달하던 공보의 수가 올해 500여 명대로 급감한 사실을 지적하며, 이는 이미 15년 전부터 현역병 복무 기간단축에 따른 인력 이탈을 경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대책 마련을 소홀히 한 결과라고 강력 비판했다.
공보의 급감 현상 중 가장 뼈아픈 대목은 치과나 한의과에 비해 의과 공보의 감소 폭이 유독 가파르다는 점이다.
보건복지부와 병무청 자료를 종합하면 과거 1000명을 상회하던 신규 의과 공보의는 이미 200명대 선까지 무너졌다. 2025년 기준 신규 의과 공보의는 247명에 불과했으며, 2026년 수급 전망은 더욱 비관적이다.
박재일 대한공중보건의사협의회 회장은 주제발표를 통해 2026년 의과 공보의 총원이 600명 지지선마저 붕괴될 것으로 예측했으며, 이한결 의협 정책이사 또한 전체 의과 공보의 수가 500명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충격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현재 전국 1200여 개 보건지소 중 의사가 상주하는 곳은 약 40% 수준으로 급락했다. 나머지 지역은 의사 한 명이 최대 ‘5개 보건지소’를 순회 진료하거나 아예 운영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박재일 이사는 이를 ‘중환자로 입원한 상태’로 규정하며, 공보의 제도가 지역의료 지탱목 역할을 상실하고 있음을 경고했다.
기피 현상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타 병역과의 형평성 문제가 꼽힌다. 육군 현역병 복무기간은 18개월까지 단축됐으나 공보의는 1979년 제도 도입 이후 36개월을 유지하고 있다.
기초 군사훈련을 포함하면 실질적인 복무기간은 39개월에 달한다. 이는 현역병의 2배를 넘는 수치로, 의대생들 사이에서는 굳이 공보의를 선택해 경력 단절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실제 2025년 기준 현역 입대를 선택한 의대생 및 전공의는 2800명 이상으로 폭증했다.
박재일 이사가 제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복무기간이 24개월로 단축될 경우 의대생의 약 60% 이상이 공보의나 군의관 복무를 희망하는 것으로 나타나 복무기간 단축이 가장 실효성 있는 대책임을 뒷받침했다.
장기간 복무 더해 경제적 처우 역전 현상 발생
경제적 처우 역전 현상 역시 심각하다. 2026년 기준 병장 수령액이 월 205만 원 시대를 열었지만, 공보의 급여는 중위 호봉 수준 기본급에 불과해 전문직으로서의 경제적 유인은 완전히 소멸했다.
여기에 열악한 관사 환경과 지자체의 행정적 갑질은 이들을 현장에서 더욱 밀어내고 있다.
유지환 대한공중보건한의사협의회 회장은 해풍이 부는 바닷가 관사에서 난방비 지원이 안 돼 텐트를 치고 숙박하는 공보의들 사례를 폭로하며, 폭언과 폭행에 노출된 공보의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전무하다고 토로했다.
업무 환경 변질도 문제다. 의료 공백을 메우기 위해 상급종합병원으로 대거 파견되는 조치가 반복되면서 이들은 응급실과 중환자실의 ‘땜질용 인력’으로 동원되고 있다.
허목 김해시 보건소장은 “공보의들이 공공의료에 대한 교육 없이 현장에 투입돼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하며, 별도 교육 과정과 마인드 제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부처 내에서도 위기감은 공유되고 있으나 국방부 태도는 신중하다.
임은정 보건복지부 과장은 “복무 기간 단축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제도 개선을 검토하겠다”고 밝혔으나, 우호석 국방부 과장은 “복무 기간 단축 시 필요한 인력이 1.5배 이상 늘어나는 점을 언급하며 군 전투력 유지와 타 직역 장교와의 형평성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고 난색을 표했다.
반면 박기주 법무부 의료과장은 “교정시설 공보의가 2009년 56명에서 2025년 12명으로 급감해 의료 사각지대가 발생하고 있다며 즉각적인 유인책 마련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각 계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관련 문제에 대한 속도감 있는 해결책 마련도 쉽지 않은 셈이다.
공보의 부족 사태→지역의료 붕괴 직면
공보의 부족 사태는 농어촌 노인들 의료 고립과 지방의료원 응급실 폐쇄라는 재앙으로 현실화되고 있다.
서영석 의원은 의료 취약지를 버텨온 공보의들이 사라지는 현실에 대해 국방부의 전향적인 결단을 촉구했다.
결국 공보의를 지자체의 저렴한 인력 자원으로 보는 시각을 버리고, 지역 의료 시스템의 핵심 축으로 예우하는 인식의 전환과 함께 복무 기간 단축 및 처우 개선을 위한 입법이 이뤄지지 않는 한 지방 의료의 공동화 현상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라는 견해가 힘을 얻고 있다.
22대 국회, 복무기간 단축 법안 계류
의료계는 공보의 제도의 존속을 위해서는 22대 국회에 계류 중인 복무기간 단축 법안 처리가 시급하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현재 여야는 공보의 복무을 24개월 수준으로 단축하고 훈련기간을 복무기간에 산입하는 내용의 법안들을 각각 발의했으나, 행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로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병역 이행 수단이 아닌 지역 필수 의료 전문가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보수체계 전면 개편과 진료 환경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공보의를 지자체의 저렴한 인력 자원으로 보는 시각을 버리고, 지역의료 시스템 핵심 축으로 예우하는 인식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한 공보의 소멸과 그로 인한 지방의료 공동화현상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 될 것이다. 제도 근간을 재설계해야 할 마지막 골든타임이 지나가는 시점이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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