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의학계는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터널을 지나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왔다. 국내 학술대회는 이제 단순한 내부 행사를 넘어 수천 명의 해외 석학들이 모이는 ‘국제 학술대회’로 격상됐으며, 질적·양적 성장을 통해 이른바 ‘K-의학’의 위상을 전 세계에 증명하고 있다. 하지만 화려한 위상 뒤에 가려진 인프라 현실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학술대회의 성지(聖地)로 불리던 주요 거점 호텔들은 사라졌고, 남아있는 시설의 대관료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주요 의사회 학술대회 섭외난은 물론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학회마저 다국적 제약사들의 경직된 규제 잣대까지 더해지며 학술 활동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이에 데일리메디는 의학계가 직면한 학술대회 인프라 난제를 짚어보고, 지속 가능한 의학 발전을 위한 대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주]
대한민국 의료 학술 활동을 지탱해 온 기본 인프라가 붕괴 위기에 직면하면서 의료계 내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특히 수십 년간 학술대회 거점 역할을 했던 주요 호텔들이 잇따라 대관 사업을 중단하거나 사라지면서 재정 기반이 취약한 개원의 중심 학회들은 학술활동 중단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 우려하고 있다.
대한외과의사회(회장 최동현)는 최근 학술활동 인프라 부족 문제를 개별 학회 문제가 아닌 국가가 해결해야 할 공익적 과제로 규정하며 정부와 지자체의 전폭적인 지원을 강력히 촉구했다.
최동현 회장은 데일리메디와의 통화에서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대관 시장 주도권이 사실상 호텔로 넘어갔다”고 토로했다.
이어 “대관료가 급등하는 추세 속에 이대로 가다가는 장소 확보를 위해 학회들이 ‘입찰’ 경쟁까지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다”고 덧붙였다.
의사회가 이처럼 강한 우려를 표명하는 배경에는 수도권 내 대규모 학술 행사를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의 급격한 감소가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지난 2024년 말 33년의 역사를 뒤로하고 폐업한 양재동 더케이호텔서울 공백은 의료계에 큰 타격을 줬다.
더케이호텔은 그간 접근성과 수용 인원 면에서 개원의 학회들 ‘성지’와도 같았던 곳이었으나, 재개발 절차에 들어가며 대관이 완전히 중단됐다.
수익성 지속 악화, 주요 호텔 줄폐업 예견된 참사
이러한 장소 부족 사태는 이미 수년 전부터 예견된 흐름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83년 개관해 약 40년 간 한국 비즈니스의 상징이자 의료계 대형 이벤트 중심지였던 남산 밀레니엄 힐튼 서울이 지난 2022년말 영업을 종료한 것을 시작으로 강남 쉐라톤 서울 팔래스 등 핵심 거점들이 연이어 주거 시설로 변모하며 인프라 쇼크를 가중시켰다.
여기에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 등 남은 5성급 호텔들마저 리모델링이나 브랜드 전환을 통해 대관 문턱을 높이면서 학회들의 선택지는 더욱 좁아졌다.
장소 부족은 곧바로 비용 폭등으로 이어졌다. 의사회에 따르면 현재 남아있는 호텔들 대관료와 식대는 코로나19 이전과 비교해 두 배 가까이 치솟았다.
이는 제약사 후원이나 등록비 수익이 한정적인 중소 규모 학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상태라는 항변이다.
최 회장은 “자금력이 풍부한 대형 국제학술대회와 달리 등록비 수익에 의존하는 개원의사회는 대관료 상승폭을 감당하기 버겁다”고 성토했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지방 컨벤션 센터 활용론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한계를 분명히 했다.
그는 “수도권 집중화 현상으로 개원의와 연자 대부분이 서울·경기권에 포진해 있다”며 “지방 개최는 참석률 저하라는 리스크를 떠안아야 하는 ‘모험’이다. 접근성이 생명인 의사회 학술대회 특성상 서울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덧붙였다.
과거 대안으로 활용됐던 대학병원 역시 대형화된 현행 학술대회를 소화하기엔 역부족이다. 수천 명이 운집하는 대규모 강의와 부스 전시를 동시 진행하기에는 공간적 한계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의료인 교육의 장(場), 이제 공익적 의미 살펴야”
외과의사회는 이러한 환경 악화가 결국 의료인의 지속적인 교육 기회를 박탈하고 장기적으로는 국민에게 제공되는 의료서비스 질적 저하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의료계는 학술대회가 단순한 내부 행사가 아닌 최신 의학지식 공유와 의료 질(質) 향상이라는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의사회는 핵심 타개책을 정부와 관련 기관에 제안했다.
▲기존 호텔 중심 대관 구조에서 탈피해 MICE 전문시설로의 전환 유도 ▲의료 학술행사를 공익 활동으로 인정해 지자체 및 공공기관 시설 대관 시 우선권과 비용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히 의료단체와 학회가 안정적으로 학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중장기적인 인프라 정책 마련과 ‘의료계 전용 컨퍼런스 센터’ 구축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또 공간과 비용 제약을 극복할 수 있도록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병행하는 하이브리드 학술대회에 대한 유연한 제도적 지원과 규제 완화도 필수 과제로 꼽혔다.
최 회장은 “기존에 폐업하지 않은 호텔들조차 내년부터 대관 업무를 더 줄인다는 소문이 돌아 내후년 학술대회 계약조차 불투명한 실정”이라고 전했다.
이어 “국가 차원의 중장기적인 인프라 정책 마련과 함께 ‘의료계 전용 컨퍼런스 센터’ 구축과 같은 근본적인 대책이 시급하다”고 설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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