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바이러스는 인간뿐 아니라 박테리아도 공격한다. 실제로 박테리아에 감염하는 박테리오파지(bacteriophageㆍ약칭 '파지')는 여러 유형이 있다.
수십억 년 동안 바이러스와 박테리아는 생존을 위한 진화적 '군비 경쟁'을 벌여 왔다. 이 과정에서 양쪽 모두에 수많은 혁신적 진화와 반대 적응(counter-adaptation)이 일어났다.
최근 생물의학 분야의 과학자들은 박테리오파지에 관심이 많다. 파지는 지구상에서 가장 개체 수가 많은 유기체로 꼽힌다. 과학자들은 '슈퍼버그'로 통하는 다제내성균의 감염 치료에 파지를 이용하는 방법을 찾고 있다.
파지가 박테리아와의 경쟁에서 구사한 진화적 전략의 비밀을 푸는 게 핵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크게 주목할 만한 파지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점보 파지'(jumbo phages)라는 초대형 박테리오파지 그룹이 막강한 세균 방어 체계를 갖춘 것으로 밝혀졌다.
점보 파지는 인간을 비롯한 동물 세포의 핵과 유사한 '차폐 구역'(shielded compartment)을 입자 내에 구축했다. 방(房)과 비슷한 이 구조는 바이러스 입자의 유전 물질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유전 물질이 안정적으로 지켜지는 건 바이러스 입자 복제와 증식에 꼭 필요하다. 과학자들이 이 구조를 사실상의 '바이러스 핵'으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이러스 입자 내에서 인간의 세포핵과 유사한 공간을 발견한 건 처음이다.
미국 샌디에이고 캘리포니아대(UCSD)의 엘리자베스 비야(Elizabeth Villa) 생물물리학 부교수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3일(현지 시각) 저널 '네이처'(Nature)에 논문으로 실렸다.
파지의 유사 핵 구조를 찾는 덴 초저온 전자 현미경(cryo-electron microscopy), 고해상 단층촬영 등의 첨단 이미징 기술이 동원됐다.
하워드 휴스 의학연구소의 연구원이자 논문의 공동 교신저자인 비야 교수는 파지의 유사 핵에 대해 "방과 흡사하지만, 지금까지 자연에서 본 적이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 구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개별 원자부터 전체 바이러스 입자 수준에서 알아냈다.
비야 교수와 동료 과학자들은 첨단 컴퓨터 기술로 모의 실험을 해서 이 구조가 유전 물질 등 꼭 필요한 요소만 받아들인다는 걸 확인했다.
이 구조는 또 박테리아의 위협을 차단하는 방어 메커니즘 역할도 했다. 필요할 때 커지는 '탄력 방패' 역할을 하다가 어떨 땐 특정한 물질이 드나드는 걸 매우 정확하고 선별적으로 제어했다. 유사 핵 구조의 외피(shell)는 하나의 단백질로 만들어졌다.
비야 교수는 "이 발견으로 파지에 관한 생물학에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면서 "이 구조가 보여주는 건 매우 기이한 생명 활동"이라고 했다.
이번 연구 결과가 주목받는 건 유사 핵을 형성하는 파지가, 세균 감염에 쓰는 '파지 치료'(phage therapies)의 효과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파지는 이미 박테리아의 방어 체계를 교란할 수 있게 진화돼 박테리아를 더 잘 공격할 수 있다고 한다.
공동 저자로 참여한 UCSD의 조 포글리아노 생물학 교수는 "향후 파지 치료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파지 핵'(phage nucleus)에 대해 더 많은 걸 알아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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