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하 /서동준·이슬비 기자] 1만여 명이 넘는 전공의들이 홀연히 병원을 떠난 지 두달이 돼가지만 의정 갈등은 변함없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다.
전공의들은 의대 증원 문제를 차치하고도, 지난 두 달간 마주했던 정부와 국민들의 날 선 시선과 억대 배상으로 돌아올 수 있는 실수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전문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젊은의사 34% "전문의 안한다"…필수과 이탈률 더 높아지는 추세
사직 후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두 달간 자취를 감춘 가운데, 몇몇 지표를 통해 그들의 복귀여부를 엿볼 수 있다.
대전성모병원 사직 전공의 류옥하다씨가 지난 2일 전공의와 의대생 총 1581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약 34%인 531명이 "향후 전공의 수련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현 사태가 원만히 해결된다고 해도 3분의 1가량은 전문의 과정에서 이탈하는 셈이다.
그나마 복귀 여지를 남긴 전공의들도 90% 이상 의대 정원 증원을 포함한 '필수의료 정책패키지의 백지화'를 요구하는 가운데, 정부가 지속 의료개혁에 대한 강경한 의지를 내비치는 사이 이탈자만 더욱 늘고 있다.
류옥씨는 "전공의 절반 가량은 정말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면서 "내과, 외과, 산부인과, 소아과(내외산소) 등 '필수적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들일수록 이탈률이 높다"고 말했다.
빅5 병원 A교수도 “전공의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너무 상처를 많이 입어 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진 것 같다"면서 "특히 '내외산소'에 있던 이들이 안 돌아오고 딴 길을 찾아갈 가능성이 크다"고 내다봤다.
의대생까지 수련 과정 거부감 증폭, 필수과 희망자는 1% 미만
필수의료 전공의는 이번 사태가 일어나기 전부터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올해 1월 보건복지부를 통해 제출받아 분석한 전공의 현원 현황에 따르면, 소아청소년과, 외과, 흉부외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등 5개 과 전공의 현원은 지난 2014년 2543명에서 10년만인 2023년 1933명으로 610명(24%) 급감했다.
과목별로 살펴보면 소청과의 낙폭이 가장 컸다. 지난 2014년 840명이었던 소청과 전공의는 2023년 304명으로 536명(63.8%) 감소했다. 외과는 2014년 599명에서 2023년 423명으로 176명(29.4%) 줄었다.
이런 상황에 '내외산소' 전공의들의 완전한 이탈 경향이 뚜렷해지며 의료계에서는 "필수의료를 살리겠다며 필수의료를 파괴하고 지역의료를 살리겠다며 지역의료를 파괴하고 있다"는 비판이 잇따르고 있다.
의대생들 역시 이번 사태로 전공의 수련에 거부감을 드러내며 먼 미래의 전망마저 어둡게 하고 있다.
의대생 단체 '투비닥터'가 최근 의대생 85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내과·외과·산부인과·소아청소년과·흉부외과·응급의학과·신경과·신경외과 등 '바이탈과' 전공을 고려 중인 의대생은 83.9%에서 의대정원 확대 정책 발표이후로 19.4%로 급락했다.
세부 전공별로 보면 내과와 외과에 지원할 의사가 있는 의대생은 전체 25.6%에서 4.5%로 5분의 1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특히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응급의학과, 흉부외과 희망자는 1%에도 못 미쳤다.
정부가 펼친 '의사 악마화' 패러다임, 전공의들에게 큰 상처 남겼다
전공의 사직을 비롯한 최근의 사태는 정부의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에서 촉발됐지만, 전공의들이 자신의 걷던 길을 포기하게 만든 이유는 달리 있었다.
류옥씨가 진행했던 설문 중 '향후 전공의 수련의사가 없다'고 답한 젊은의사들 중 87.4%는 그 이유로 '정부와 여론이 의사직종을 악마화하는 것에 환멸이 났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비단 젊은의사들뿐 아니라 의료계 전체가 공통적으로 이번 사태를 악화시킨 가장 큰 원인은 정부 인사들의 말에서 비롯됐다고 강조한다.
특히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국민 생명과 안전을 볼모로 하는 집단행동을 멈춰야 한다"거나 의대 증원 갈등을 "국민과 특권적 의사집단 간 싸움"이라고 규정하는 등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의료계는 또 전공의들에게 업무개시명령과 사직서 수리 금지명령 등을 통해 "범죄자 취급을 하고 있다"고 힐난했다.
이에 대한의사협회와 교수 단체인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 전국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각기 복지부 장‧차관 해임을 요구했으며, 이번 제22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 당선된 국민의힘 한지아 당선자도 지난 2월 "의사들을 자극하고 악마화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촉구했다.
류옥씨가 지난 16일 공개한 전공의 20인 인터뷰에서도 전공의들은 "정권마다 의사를 악마화 할 것이고, 국민들은 함께 돌을 던질 것이기에 전공의 수련을 받고 싶지 않다"거나 "정부, 언론, 여론 어디를 봐도 희망이 없다. 이번 사태가 마무리된다 해도 의사에 대한 인식과 전공의 수련환경이 좋아질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생겼다"고 토로하며 우려했다.
결국 사직 전공의 1360명은 지난 15일 박 차관에 대한 집단고소를 진행하기에 이르렀다.
분당차병원 사직 전공의 정근영 씨는 이날 의협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부의 폭압적이고 일방적인 의대정원 증원과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 강행을 보면서 전문의 수련 후에도 이 나라의 의료에 더 이상 미래가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 차관이 건재한 이상, 의료계와 정부의 정상적 소통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파트너십 갖고 국민 건강을 위해 협력해야 할 관계가 파탄났다"고 목소리 높였다.
빅5 병원 A교수도 "지금의 분위기에서는 의사들 감정을 굉장히 자극했던 정부 인사들이 물러나고, 그 자리에 대화의 파트너가 될만한 분이 와야 대화의 물꼬가 터질 것 같다"고 동의했다.
선의의 의료행위 베푼 후 돌아오는 법적 제재 "두려움에 내쫓겼다"
전공의들이 수련 과정을 지속하기를 망설이는 또 한 가지 이유는 법적 부담에 있다.
류옥씨가 지난 16일 공개한 전공의 인터뷰에서 2년차 레지던트 B씨는 "수련과정에서 기소당하고 배상까지 이르는 선배와 교수님들을 많이 봤다. 선의의 의료행위에 대한 면책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복귀는 못 할 것 같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2년차 레지던트 C씨도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한 무분별한 소송을 막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류옥씨도 "인턴 1년 과정 중 두 번을 기소당한 동료도 있었다"며 "1년에 한 응급실에서 700명 정도 사망한다고 한다. 그중에 한 번이라도 실수할 경우 17억원을 물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두렵다"고 토로했다.
이어 "이런 판결이 하나하나 뜰 때마다 필수의료를 지망하는 전공의들이 툭툭 떨어져 나간다. 선의의 의료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수갑을 차고 실형이 내려진다. 누가 위험한 의료행위를 하고, 누가 환자를 살리려고 하겠나"라고 울분을 토했다.
이에 정부는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 추진 등 의사들의 법적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했다고 강조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일 대국민 담화에서 "4대 의료개혁 패키지에 의료사고와 관련한 법적 리스크 부담을 완화해 주기 위해 사법 리스크 안전망을 구축하는 방안도 포함됐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의료계는 정부가 내놓은 의료사고처리특례법 제정안을 두고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한다.
특레법 면책범위에서 '사망'이 제외된 데다, 갈수록 판결 배상액은 높아지고 있지만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 제한' 내용도 빠졌기 때문이다.
또 국회에서는 필수의료 수행 시 사고에 따른 형사처벌 감경·면제 요건을 규정하는 '필수의료 육성 및 지원 등에 관한 법률안'이 계류된 상태다.
류옥씨는 "사직한 전공의들은 가혹한 수련환경과 부당한 정부 정책으로부터 병원을 떠난 것이지 환자 곁을 떠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우리나라의 의료체계가, 환자와 의사의 관계가 회복 불능에 이르지 않도록 정부는 의대 증원부터 원점에서 재논의를 해달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