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계에서의 현대 의료기기 사용 확대와 관련해 촉각이 곤두세워지고 있다.
의학계가 한의계의 의과 의료기기 사용에 계속 불편함을 드러내는 가운데, 최근 정치권이 한의학 현대화 및 육성에 시동을 거는 한편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이용을 허용하는 대법원 판단까지 나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는 "초음파 기기 외에 X-ray, 혈액검사 등 진단 영역에 쓰이는 의료기기까지 활발히 활용할 수 있도록 기반을 닦겠다"는 의지를 천명해 앞으로 상당한 파장이 예상된다.
지난 22일 의학계와 한의계가 지난 10년 이상 신경전을 벌여온 한의사 초음파 기기 사용의 불법 여부에 대한 결론이 뒤집혔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지난 2010년부터 2012년까지 초음파 기기를 사용해 의료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한의사 A씨에게 무죄 취지 판결을 내렸다.
A씨가 '면허 범위 외 진료행위'를 했다고 보고 유죄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 서울중앙지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낸 것이다.
1심에서 법원은 "한의사가 초음파 기기를 사용하면 보건위생상 위해(危害) 우려가 있다"며 벌금 80만원을 선고했고, 2심에서는 A씨가 제기한 항소가 기각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재판부는 "한의사도 의사와 동일한 목적과 방법으로 초음파 검사를 한다고 일반인이 오해할 가능성이 크고, 서양의학에 따른 진단·치료를 도외시할 우려가 있다"고 봤다.
그러나 이번 판결에서 대법원은 "한의사가 모든 현대 의료기기를 사용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초음파를 진단 보조수단으로 사용한 행위는 의료법상 무면허 의료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는 지난 2013년 헌법재판소가 내린 판결과 상반되는 결과기 때문에 더욱 파장이 컸다. 당시 헌재는 某한의사의 "초음파 진단기기 사용을 금지한 의료법의 위헌 여부를 판단해달라"는 헌법소원을 기각했다.
이번에 대법원은 "헌재는 '수차례 한의사가 초음파 진단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면허 외 의료행위'라고 결정했지만 최근에는 국내 한의과대학 의료기기 사용 관련 교육과정이 지속적으로 강화됐다"고 설명했다.
통상적으로 의료행위에 수반되는 일정 수준 이상의 위해(危害)가 발생할 우려에 대한 근거도 충분치 않다는 게 대법원 시각이다.
한의협 "현대 의료기기 사용 활성화 추진, 대국민 홍보 강화"
지난달 대한의사협회(의협) 한방대책특별위원회가 한의사 국가시험 필기시험에서 의과영역 및 의과 의료기기 사용 관련 문제에 대해 지적하면서 양측의 날선 공방이 오갔다.
의권 확대를 위해 초음파기기 뿐 아니라 엑스레이, 혈액검사 등 의과 진단용 의료기기 사용의 타당성을 주장해온 한의계는 최근 대법원 판결 등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대한한의사협회는 이번 대법원 판결을 전향적이라고 봤지만, 사실상 갑작스럽지는 않다는 입장이다.
권선우 한의협 의무이사는 데일리메디와의 통화에서 "국민 건강, 의료선택권 증진을 위해 한의 임상 현장에서 현대 진단용 의료기기를 쓰는 건 당연한 일이다"며 "한의계가 다년간 해온 노력을 재판부가 인정해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한의사의 진단용 의료기기 사용은 더 정확한 진단·의료행위를 하기 위한 방법으로 정해진 면허범위 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졌다"며 "향후 관련 제도화, 내부 교육·역량강화, 대국민 홍보 등을 힘있게 추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최근 불거졌던 한의사 국가시험의 현대 의료기기 문제 논란도 이번 판결로 한 번에 정리됐다고 본다"고 자신감을 피력했다.
영상의학회 등 의학계 발칵···"오진 가능성 높일 것, 면허 범위 확정해야"
이번 판결 소식이 전해지자 의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대법원 판결을 규탄하면서 한의계의 향후 행보를 감시하겠다"고 천명했다.
대한의사협회는 23일 "현행 의료법에서 면허범위 외 의료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각 의료직역의 전문성을 고려하지 않고 면허 경계를 파괴해버린 것은 의료인 면허제도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라고 분노했다.
이어 "한의사들이 이번 대법원 판결을 빌려 의과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등 면허범위를 넘어서는 무면허의료행위를 지속적으로 시도한다면, 불법의료행위로 간주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총력 대응하겠다"고 강조했다.
대한영상의학회도 발끈했다. 학회는 대법원 판결에 대해 "초음파 장비 자체 위해도인 방사선 유무·방사선량, 또는 직접적인 위해 가능성 기준으로만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며 "의학적 용도 진단 장비 사용 위험성은 반드시 '정확한 진단' 가능성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초음파 검사만으로 환자 질환을 추정하고 확진하는 것은 오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강조했다.
소아청소년과의사회도 대법원 앞으로 달려갔다. 임현택 소아청소년과의사회장[사진]은 23일 오전 대법관 출근 시간에 맞춰 1인 시위를 벌였다.
그는 "향후 한의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믿기지 않는 분들은 소청과의사회로 연락 달라"며 "우리가 검사비를 지원하고 검증 결과를 알려주는 캠페인을 진행하겠다"고까지 했다.
이밖에 대한정형외과의사회, 대한산부인과의사회, 서울시의사회도 성명을 내고 일침을 가했다.
정치권, 한방난임치료 성과 공감···"한의학 현대화" 약속
근래 정치권에서는 야당 의원을 중심으로 근래들어 한방난임치료 성과 등을 고무적으로 평가하고 한의학 및 한의약학의 적극 육성을 약속하고 나서는 분위기여서 향후 추이가 주목된다.
최근 서영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난임 극복 지원 사업 대상에 한방난임 치료비 지원을 추가하는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같은 당 강선우 의원은 한의약육성법 일부법률안을 대표발의했다. 이에 대한산부인과학회, 산부인과의사회, 대한의사협회 등 양의계는 거세게 반발하며 불편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이 같은 의지는 최근 열린 대한한의사협회 창립 124주년 기념 행사에서도 확인됐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난임치료 영역에서 양방과 한방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 숫자로 나타나고 있다"며 "확실한 관련 증액을 이뤄내겠다"고 천명했다.
이어 "지난 100년 동안 양의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지만, 오랫동안 우리 건강을 지켜왔던 것은 한의학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있다"며 "우리 것을 한쪽으로 밀어 넣는 방식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춘숙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한의학은 더 이상 낡은 우물이 아니라 현 시대와 접목해 연구, 발전시켜야 하는 문화유산"이라며 "한의학에 적극 투자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