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의료원 경영 성적표의 불편한 진실
2016.06.24 07:16 댓글쓰기

까까머리 고교시절 방(榜)에 대한 추억이 아련하다. 시험 후 교실 앞 복도는 늘 복작였다. 길다란 종이에 굵은 매직으로 쓰인 성적표를 확인하려는 인파였다.

 

우리는 그 어마무시한 크기의 수제 성적표를 ‘방(榜)’이라 불렀다. 그곳에는 1등부터 50등까지 전체 석차가 촘촘히 적혀 있었다. 반은 물론 이름도 함께였다.

 

“이번에는 0반 00가 1등이네”, “이제 담탱이(담임)한테 죽었다”, “나는 언제 방에 이름을 올려보나”, “50명 중 우리 반은 몇 명이야?”

 

방(榜)이 붙는 날이면 곳곳에서 매타작 소리가 그득했다. 다른 학급에 견주고, 지난 번 성적과 비교하며 몽둥이는 쉼 없이 허공을 갈랐다.

 

성적표 앞에는 희비가 공존하기 나름이다. 그것이 공개된 상태라면 당사자나 주변인이 느끼는 희비의 강도는 배가된다.

 

그래서 우리는 방(榜)이 싫었다. 아니 솔직히 두려웠다. 학교는 경쟁심 유발을 위한 자극제 역할을 기대했겠지만 당사자인 학생들은 반감이 적잖았다.

 

요즘 세상이면 상상도 못할 그 꼬깃꼬깃한 기억을 되살린 것은 21일 전격 공개된 전국 34개 지방의료원들의 성적표 때문이었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결산보고서를 토대로 2015년 지방의료원들의 경영실적을 공개했다. 인건비 절감 등 각고의 노력으로 의료이익이 늘고 경영이 개선됐다는 게 요(要)다.

 

‘만성적자’에 허덕이던 지방의료원들의 경영전선에 훈풍이 불고 있다는 미담이었다. 여기에 각 의료원이 거둔 의료이익 증가액도 친절하게 알려줬다.

 

하지만 이 성적표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다. 공공의료 최일선에 있는 이들 기관에게 지나치게 ‘실적’이란 잣대를 드리우는 현실이 개탄스러웠다.

 

정부가 내놓은 사례를 보면 더욱 가관이다. 의사들에게 연간 진료목표를 부여해 환자를 끌어모은 경우도 경영 개선 성공 사례로 제시됐다.

 

스타급 의사 영입, 수술건수 증가 등 민간 의료기관에서나 이뤄질 법한 마케팅 전략을 구사한 지방의료원들을 향해 정부는 시종일관 ‘참 잘했어요’를 외쳤다.

 

지방의료원들은 늘 ‘공공성’과 ‘수익성’ 사이에서 천착을 거듭한다. 공공성을 추구하자니 수익성이 울고, 수익성을 추구하자니 공공성이 우는 형국에 한숨만 늘어난다.

 

여느 민간병원들처럼 적당한 비급여와 적당한 부대사업을 통한 수익성 개선 여지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지방의료원을 찾는 환자군과 설립 취지가 마음에 걸린다.

 

이들의 경영상태를 ‘착한적자’라고 일컫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지방의료원들의 각성이 필요한 부분도 있다. 공공기관 특성상 복지부동(伏地不動) 문화가 여전하고, 인건비 부담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임금피크제, 성과관리제 등 정부가 빼어든 잇단 경영 개선 카드도 맥(脈)을 같이 한다. 지방의료원 스스로도 분명 짚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이날 공개된 경영 성적표처럼 줄세우기식 성과 지향주의는 곤란하다. 전면에서는 ‘공공의료’를 설파하고 뒤로는 ‘경영실적’을 압박하는 복지부의 이중성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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