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국수와 문화의 차이
권은중 한겨레신문 경제부 차장
2012.07.16 11:04 댓글쓰기

 

한국, 중국, 일본은 공통점이 많다. 모두 한자를 쓰며 유교와 불교 문화라는 사상의 원형질도 일치한다. 정신이나 문화뿐 아니라 신체적으로도 비슷한데 개인들의 유전자가 99%쯤 일치한다고 한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과 일본인들과는 골수기증이 가능할 정도라고 한다.


세 나라 공통점은 음식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세 나라는 세계에서 국수를 유독 좋아하는 국가이다. 서양의 이탈리아를 제외한다면 세나라만큼 국수에 목숨을 건 나라는 거의 드물다. 하지만 세나라의 국수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한참이 틀리다. 국수의 모양은 물론 재료도 전부 제각각이다. 각각 맛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세 나라의 국수는 세 나라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한-중-일 국수의 가장 큰 특징은 국물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국물의 종류는 세 나라가 다 다르다. 우리나라는 주로 소뼈나 닭뼈를 우려낸 국물을 쓴다. 반면 중국은 양뼈나 돼지뼈로, 육식이 오랫동안 법적으로 금지됐던 일본은 바다 물고기인 가다랑이로 국물을 우려냈다. 그 나라에 가장 흔한 재료로 국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국물에 말아먹는 면 역시 모양만 비슷하고 그 만드는 방법은 다르다. 면발 부분에서는 우리는 자존심을 조금 접어여 한다. 왜냐하면 중국과 일본의 면발이 대단하기 때문이다. 사대주의냐고?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두나라에 면발부문에서 밀린 것은 역사적으로 이유가 있다.


중국 면의 특징은 화려함과 다양함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중국 면발은 손으로 쭉쭉 잡아 늘려 뽑는 것이다. 보고 있으면 거의 서커스에 가깝다. 중국인의 화려한 손재주를 보여주는 셈이다. 보는 이를 압도하는 이 손재주는 어디서 왔을까?


고대 진나라 이후 하나의 중국이 된 이후 한때 세계 생산량의 절반을 담당하던 중국은 풍부한 인구와 자원을 바탕으로 문명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한나라 및 당나라 수도 장안은 과거의 생산력을 감안할 때 지금의 뉴욕은 물론 파리, 런던을 다 합쳐놓은 것 같은 규모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대 런던이나 파리는? 장안이 뉴욕이라면 런던 등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히말라야 오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중국은 당시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문명의 용광로였다. 이런 힘을 바탕으로 송나라때 세계 최초의 패스트 푸드인 육사면이 등장한다(중국의 음식 문화사·민음사 펴냄). ‘육사(肉絲)’라는 것은 고기를 실처럼 가늘게 썰었다는 뜻이다. 송나라는 중국의 북방세력과 남방세력이 통합돼 진정한 문화적 통합을 이룬 시기다. 중국인 뿐 아니라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외국인들까지 맛보았을 육사면 개발 이후 중국의 면 뽑는 기술은 일취월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좀더 국수의 전파가 빨랐을 것이다. 삼국시대에도 국수가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국수를 먹기 시작한 것은 송나라와 교류가 활발했던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밀 생산량이 많지 않던 국수는 우리에게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고 한다. 결혼식 같은 잔치 때 먹던 귀한 음식이었고 결국 ‘언제 국수먹여줄래?’ 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다.


일본은 달랐다. 조선후기 이전까지 모든 문물이 우리보다 뒤떨어졌던 일본의 국수 문화 역시 13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여러 설이 있지만, 승려 엔니가 중국 송나라에서 가서 배워온 중국 신문명의 하나가 국수였다. 엔니가 문을 연 큐슈 후쿠오카의 절 쇼텐사 안에는 우동의 발상지라는 비문이 서 있기도 하다.


일본은 16세기 이후 서양문명을 만나면서 상업이 발전했고 에도시대가 도래하면서 국수문화가 번창하게 된다. 중국의 육사면처럼 일본의 국수인 우동은 패스트푸드가 된다. 국수 상업화의 특징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요리를 한다는 점이다. 중국의 남자들이 국수를 손으로 뽑았듯이 일본에서는 우동의 장인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장인이란 어떤 일을 1만시간 이상 한 사람으로 단순한 육체 노동을 영혼이 담긴 정신 활동으로 바꾸는 이들을 칭하는 말이다. 일본은 세계 최대의 장인천국이다.


우동도 예외는 아니다. 우동 장인들의 면 제작 과정을 보면 우동만들기는 하루종일 걸린다. 온종일 한시간에 한번씩 다섯번 이상도 면을 밟아준다. 그러면 면의 탄성이 더해지고 쫄깃한 우동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화려하 손기술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이나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나라 사람 눈에는 답답한 장면이다. 지루한 과정을 거친 우동은 국수 자체의 완결성이 뛰어나 어떤 국수보다 소스나 국물에서 자유롭다. 심지어 육수 없이 간단히 날계란 노른자나 간장에 비벼 먹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국수는 일본과 중국에 견줘 떨어진다는 뜻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중국과 일본 면의 특징은 상업화다. 자본의 힘에 의해 국수가 경쟁적으로 발전한 것이다.

 

반면 우리 국수는 다른 형식으로 발전해왔다. 상업을 천시하고 생산력이 미약한 우리나라에서 쌀보다 배아가 커 제분하는데 대형 설비와 기술이 필요한 밀의 재배는 쉽지 않았다. 이는 중국의 눈치를 보며 상업과 공업을 철저히 억압한 조선시대에는 더욱 심했다. 그래도 백성들은 자기 나름의 국수를 즐겨 먹었다.


얼마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활동 중인 이탈리아 주방장이 너희 나라 최고의 음식이 뭐냐고 물어봤더니 봉골레(조개의 이탈리아 말) 감자뇨끼를 꼽았다. 우리나라로 치면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감자수제비다. 국수를 만들 수가 없어 손으로 뜯어낸 수제비를 이탈리아에서는 뇨끼라고 부른다.


파스타의 원조는 잘사는 북부 이탈리아가 아니라 남부 이탈리아로 알려져 있다. 파스타의 대표주자인 봉골레나 엔초비 파스타의 허허실실한 맛을 생각해 보면 가난한 남부 음식이 맞을 것도 같다. 엔초비와 올리브 열매를 넣은 파스타의 이름이 ‘푸타네스카(이탈리아 말로 창녀)’인 것도 멸시할만큼 작은 물고기란 뜻을 가진 물고기인 멸치로 만든 하찮은 파스타란 의미가 아니었을까?


수제비 마찬가지로 격조 있는 음식은 아니다. 칼국수조차 만들 기술이 없는 시골 아낙들이 만들던 국수의 대용품이다. 면 대신 손으로 아무렇게나 뜯은 수제비는 국수와 다른 맛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렇게 민초들이 개발해 빈 듯하면서도 가득찬 음식이 제법 있다.


수제비는 그나마 밀가루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의 음식이다. 그 귀한 밀가루를 구할 수 없는 우리 백성들은 산에서 아무렇게 잘하는 메밀의 씨앗을 갈아서 국수로 먹었다. 바로 냉면이다. 메밀은 산에서 자라는 밀이란 뜻이다. 세계에서 메밀을 먹는 민족은 그렇게 많지 않다. 메밀에는 사람 몸을 차갑게 하는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한족은 메밀을 먹는 민족을 야만족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춥고 가난한 시절 먹었던 냉면은 메밀이 가진 약리적 성분과 그 빈 것 같으면서도 가득 찬 오묘한 맛 때문에 오늘날에는 여름철의 별미가 됐다. 밀가루로 길고 가늘게 뽑는 면으로 만드는 국수라는 음식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한-중-일은 이처럼 비슷하면서도 각각 다르다.


나는 세 나라 국수를 모두 좋아한다. 집에서 직접 육수는 물론이고 면까지 만들어 먹기도 한다. 만들어 먹는다는 말은 면발을 직접 뽑는다는 뜻이다(물론 냉면 쫄면 따위 기계를 이용한 강한 압력이 필요한 면은 제외다). 우동이나 중국면발이나 메밀국수를 땀을 흘려가면서 만들다 보면, 세나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온몸으로(특히 혀로) 느낄 수 있다.


지금 한-중-일은 송나라 이후 최고의 밀착 관계다. 3국은 세계 인구의 22.3%, 국내총생산(GDP)의 19.6%, 교역량의 17.6%, 외환보유액의 45.7%를 차지하는 거대경제권역으로 부상했다. 세나라가 뭉치면 유럽은 물론 미국과 경제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세나라의 관계는 여전히 뭔가 벽이 느껴진다. 서울 명동에만 나가면 우리나라 사람보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이 더 많은 것 같은데도 말이다. 따뜻한 우동, 걸쭉한 울면, 담백한 냉면을 한-중-일 세나라 사람들이 서로 나누면 이런 마음의 벽을 뛰어넘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나는 이번 주말 우동을 밀고 울면에 쓸 닭국물을 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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