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의학전문학교 한국인 졸업 앨범
정준기 소장(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2012.05.28 21:42 댓글쓰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은 1899년에 설립된 관립의학교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의학교는 1907년 대한의원 부속 의학교로 변했고, 1910년 조선총독부 부속 의학강습소로 바뀌었다가,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1907년에 개원한 대한의원도 조선총독부의원이 되었다가 경성의학전문학교의 실습병원 역할을 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가 생기면서 그 부속의원이 되었고, 경성의학전문학교(경의전)는 소격동에 병원을 짓고 나간다.

 

해방이 되자 미국군정은 서울에 있는 국립 고등교육기관을 통합해 서울대학교를 만들고, 이에 따라 제국대학 의학부와 경의전이 합쳐 서울의대가 된다.

 

경의전 이전에는 모두 한국인이었으나 의학전문학교가 되자 정원의 1/3을 일본 학생 중에서 뽑았다. 선발인원은 80~100 명으로 항상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학교 내에 한국인들의 비중이 많아 민족주의적 색체가 강했으며, 3ㆍ1운동 당시 전문학교 중 가장 많은 학생이 운동에 참여하였다.

 

다음 본문은 경성의학전문학교 1924년 한국인 졸업생들이 만든 졸업 앨범의 머리말이다.

 

제 곡조를 각각 울리건마는 이것을 종합하면 조화된 선율을 이루고, 한 개 한 개의 돌이건만 쌓아놓아 보면 기묘한 탑을 만들 수 있다. 운명의 장난인지 전생의 인연인지 모르나 13도 곳곳에서 생면부지인 마음이 다르고 얼굴이 같지 않은 50 여 명의 배우들을 한 무대에 쓸어 넣고 시치미를 뚝 떼고 지구는 태양을 네 번이나 돌았다.

 

또 다시 네 번째 눈이 녹고 꽃이 피고 얼음이 사라지고 새가 울려고 한다. (이 책에는) 4년 전에 개막되었던 모의극(模醫劇)의 슬픈 장면, 우스운 구절 등을 갖추고 갖추어 새겨 놓았으니 하모니 있는 선율의 울림 같고, 기교 있게 쌓아 놓은 탑과 같지 않느냐.

 

모의극의 막은 내리고 다시 머리에는 이론을 갖추고, 손에는 실제 칼 을 잡고, 가슴에는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사면팔방으로 각각 제 길을 걸으려 할 때 우리는 슬퍼할까! 기뻐할까! 하룻밤에도 만리성을 쌓는 다거늘, 1,460일을 살과 살이 서로 부딪치고 영혼과 영혼이 서로 호응 하였으니, 한 부모의 뱃속에서 나오지야 않았을망정 그 사이 연결됨이 형제와 무엇이 다르리!

 

심술 많은 서모에게 때때로 죄 없이 구박을 받고 불쌍한 외로움은 형제들이, 옛 어머니 생각하고 머리를 맞대고 울어본 적이 몇 번이며 등어리 때려서 밖으로 쫓아낼 때 젖 먹던 힘을 모아 반항한 적이 몇 차례냐. 각 사람이 다 외롭고 전체가 또 외로웠으나 그래도 믿고 의지할 데는 우리 많은 것처럼 우리는 고독할수록 더욱 우리끼리의 애정이 깊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쓴 지금은 언제나 서로 원만하게 만날지 기약하지 못하고 비록 한쪽 육신이나마 떠나게 되었으니, 옛일을 생각하든지 뒷일을 바라보든지 어찌 슬프지 않을쏘냐. 그러나 다시 한 번 돌려 생각하자. 아녀자가 아닌 우리는 감상적인 비애향락(悲哀享樂)에 발을 멈출 수 없다.

 

일만 삼천리나 되는 폐허의 땅은 누구의 입김으로 새 문화가 일 터이며, 이천만의 황량한 마음은 누구의 손으로 개척될 터이냐. 우리의 동맥 속에는 선홍색의 피가 뛰놀고, 우리의 동공에는 형형한 광휘가 번쩍이고, 우리의 폐에는 씩씩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추수할 곡식이 많을수록 추수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기쁜 것 같이 우리가 건설하고 개척하고 개조할 가을이 풍부하니, 예지와 이로움과 양심을 가진 우리의 가슴이 자못 희열과 용기로 충만하다.

 

지금 우리가 맛보는 기쁨과 슬픔을 죽는 날까지 이야기 할 자는 기록해 놓은 이 책뿐이다. 생명의 촛불이 닳아갈 때 수염을 휘날리며 턱 밑에 앉은 어린 손자와 함께, 우리의 삼월 봄날을 속살 그대로 그려주는 이 책을 들고 눈시울에 맑은 이슬이 맺혔다가 오목한 뺨에 미소를 지을 그때, 우리의 감회가 어떠할쏘냐.

 

여러분이 읽어보신 것처럼 생각보다 훨씬 문학적이고 저항적이다. 당시 한국 사회의 지성인이던 경의전 학생들은 누구보다도 일제강압의 현실을 잘 알고 있어서 민족의식이 강하였다. 총독부 자료에 의하면 3ㆍ1만세운동으로 한국인 학생의 20%에 해당하는 31명이 구금되었으며 79명이 퇴학당했다. 1924년 졸업생 중에는 그때 퇴 학 맞았다가 복귀한 김동익 같은 학생도 있었다.

 

여기에 1921년 5월 구보(久保) 교수의 망언 사건이 일어난다. 해부학 교수이던 그는 실습실 두개골이 없어진 것을 한국인 학생의 소행으로 단정하고, 해부 구조상 한국인은 야만인이라고 한 것이다. 평소에도 민족차별을 하던 구보 교수였다.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당국은 퇴학과 무기정학을 내리고 학생들은 전원 자퇴를 신청했다. 이 사건은 곧 사회문제가 되었고 총독의 중재에 따라 징계조치를 취소하고 구보 교수는 학교를 떠났다.

 

그때 경의전의 교장은 시가 가요시였다. 이질균을 발견한 일본 의학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이질균도 그의 이름을 따서 Shigellosis로 명명하였다. 시가 교장은 학생들에게도 관대하고 한국인에게도 아주 호의적이었다고 한다.

 

또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를 설치하는 법령이 1922년 발효되어 경의전 존재에 대한 위기의식이 교수진과 학생을 뭉치게도 했을 것이다. 이 졸업 앨범에는 머리말 다음 장에 한반도의 윤곽을 그리고, 그 안쪽 고향위치에 각 졸업생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자기 고장을 대표해 우리 조국과 민족의 앞날을 개척할 다짐을 하는 것이다.

 

반투명한 이 종이 다음 쪽에 이름 위에 어떤 표식을 해 놓았다. 자세히 보니 무궁화 표시이다! 혹독한 일제시절에 한반도를 그리고 이름위에 무궁화 표시를 한 것은 누구의 아이디어 이었을까? 아마도 이것은 인생을 건 모험이었으리라.

 

경의전을 졸업해 의사로의 평탄한 길이 보장된 즈음에 조국애, 민족정신을 나타내기 위해 시도한 무모할 정도의 저항의식! 졸업생 중 누가 머리말을 작성했는지 기록은 없다. 동기생에는 서울의대 내과의 김동익 교수, 소아과의 이선근 교수와 전남의대 이종륜 학장, 최상채 교수, 박병래 공군 군의감, 백승진 산업경제신문사장, 김명학 외과의원장, 윤치노 공안과의원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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