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가 장비였던 혈액 점도기, 1회용 개발 비화
조영일 박사(미국 드렉셀대학교)
2023.10.15 19:55 댓글쓰기

[특별기고 9] 필자가 공대를 졸업하고 어떻게 혈액점도 관련 연구를 하게 됐는지 궁금해 할 독자들을 위해 개인적인 얘기를 하고자 한다.


대학원 학생일때부터 지금까지 평생 유체역학 공부를 해왔는데, 현재도 매년 학부와 대학원에서 유체역학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유체가 물과 피이기 때문에 유체역학의 응용으로 피가 혈관 안에서 어떻게 흐르는가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피가 잘 흐르지 않는 경우 왜, 무엇때문에 잘 흐르지 않나 하는데 관심을 갖게 돼 지금까지 혈액 점도에 관한 연구를 하고있다. 


대학원을 졸업하고 처음 직장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위치한 NASA JPL(Jet Propulsion Laboratory)이었는데, NASA Life Science Office에서 재정 지원을 받은 연구를 수행하면서 긴 우주여행 후 지구로 돌아온 우주인들을 위한 심혈관계 탈조건화 프로그램(Cardiovascular deconditioning program)에 참여했다.


건강한 우주인들의 경우에도 혈액점도가 높아지게 되면 마찰력에 의해 관상동맥에 혈전이 파열될 수 있고, 급성심장마비가 올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 후 1985년에 지금 필라델피아에 있는 드렉셀 대학 교수로 옮겨와 근무했다. 그런데 하루는 지금은 작고하신 Dr. Kensey(미국의 심혈관 전문의)가 NASA JPL에서 쓴 논문들을 보고 저를 찾아와 "한번 쓰고 버릴 수 있는 혈액점도기를 만들 수 있느냐"면서 같이 일하자고 제안, 혈액 점도기 개발이 시작됐다.


당시 연구자들이 사용했던 혈액점도기는 대부분 회전식 점도기로 혈액으로 인한 감염 위험 때문에 임상에서는 사용하지 못했고, 고가 장비이기에 한번 쓰고 버릴 수 없어서 일회용 혈액점도기를 위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베르누이 법칙 수업 중 일회용 혈액점도기 개발 아이디어 얻어"


필자가 가르치는 학부 유체역학 과목에 베르누이 법칙에 관한 부분 중 수직관 두 개로 만들어진 U-shape tube에서 유체가 움직이는 문제를 가르치다가가, 어느날 갑자기 “이거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수직관 두개 사이에 내경이 작은 모세관을 끼워 넣어서 유체의 마찰력을 증가시키면 혈액점도를 측정하는데 사용할 수 있고, 일회용으로 만들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필자가 지도하고 있던 박사과정 대학원 학생과 함께 수학식들을 개발해 논문으로 발표했고, Dr. Kensey는 혈액점도사업을 위해 별도의 회사를 만들어 이들 수학식을 바탕으로 Rheolog프로그램을 개발했고 혈액점도기도 제작했다. 


현재 이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제작된 스캐닝모세관점도기가 사용되고 있다.


스캐닝모세관점도기가 기존의 회전식점도기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일회용이라 감염 위험없이 혈액의 점도를 안전하게 측정할 수 있다.


기술적인 면에서 보면,  회전식 점도기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브룩필드(Brookfield) 점도기는 혈액이 빠르게 흐를 때 점도를 측정할 수 있는데 반해 스캐닝모세관점도기는 혈액이 천천히 흐르는 환경에서도 점도를 측정할 수 있다.


혈액점도는 비뉴턴성점도 특성을 갖고 있어, 큰 혈관에서 혈액이 빠르게 흐를 때보다 혈액점도가 아주 작게 되고, 내경이 작은 혈관들에서 혈액이 천천히 흐를 때는 약 4배 증가한다.  


심혈관질환, 뇌혈관질환 등의 주요 질환을 가진 환자의 경우 미세혈관에서 점도가 4배보다 더 많이 증가할 수 있고 이 경우 혈관 벽에 생기는 마찰력도 그 만큼 증가해 미세혈관에서 유동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혈액이 천천히 흐르는 환경에서 이완기점도를 측정할 수 있다는 것은 스캐닝모세관점도기의 큰 장점이다. 


공대 기계과 학부과정에서 필수과목인 유체역학을 혈 유동에 적용한 분야를 혈유변학 혹은 생체유체역학이라고 부르는데, 혈액의 흐름을 유체역학적 원리를 이용해 공학적, 수학적으로 가르치는 과목이다. 


예를 들어 죽상동맥경화의 경우, 혈관분기에서 주로 발생하는 국소질환으로, 이것은 유체역학적인 원리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혈액학은 혈액에 있는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에 관한 연구인데 반해, 혈유변학은 크기가 다른 각종 혈관에서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혈액의 유체역학적 현상 뿐 아니라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및 혈장 단백질들이 혈액 흐름에 어떻게 간섭하며 영향을 미치는가를 이해하기 위해 혈액 물성들(전혈 점도, 혈장 점도, 적혈구 응집율과 변형율, 항복응력)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필자는 공학도로서 혈액점도 전문가가 됐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대로 개인적으로는 Dr. Kensey를 만난 덕분이다. 현재 임상에서 사용되고 있는 수많은 의료기기들이 대부분 공학도들에 의해 발명되고 개발된 것들이다.


앞으로 의료분야에서 사용될 수많은 의료기술은 대부분 공학 전문가들에 의해 만들어 질 것으로 보는데, 이를 위해 미국에서는 벌써 수십년 전부터 공과대학에 의공학과를 개설, 의료분야서 일할 능력을 갖춘 공학도들 교육에 투자하고 있다. 


현재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원격의료기술들도 대부분 공학도들에 의해 개발되고있다. 의과대학교육은 환자치료에 중점을 두고 있지, 미래에 필요한 새로운 의료기기나 의료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인물들을 키우는 교육과정이 아니다. 


심장전문의로 크게 성공했던 Dr. Kensey도 혈액점도가 심장질환자에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혈액점도를 측정해야 한다고 확신했지만 어떻게 혈액점도기를 만들어야 하는지는 전혀 몰랐다.


한국에서도 공학도들과 의료인들이 함께 힘을 합해 세계 의료시장에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댓글 0
답변 글쓰기
0 / 2000
메디라이프 + More
e-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