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프타 쇼크, 병원 의료물자 대란은 느린 국가 재난”
김주현 대한재난의학회 이사장 “주사기·수액백 막히면 수술 위태, 소모율 관리 필요”
2026.04.09 06:32 댓글쓰기

“주사기, 수액백, 수술용 장갑 등 필수 의료기기 공급망에 심각한 교란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의료기관의 진료 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재난 자원’ 공급 중단이라는 2차 위험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이번 위기는 원자재 공급의 구조적 감소에 따른 장기적이고 ‘느리게 발생하는 재난(slow-onset disaster)’의 성격을 띠고 있어 우려스럽다.”


최근 중동 정세 불안에 따른 글로벌 공급망 위기가 국내 의료현장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나프타(Naphtha) 등 석유화학 원료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병원에서 매일 사용하는 일회용 의료기기 생산이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어서다.


김주현 서울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대한재난의학회 이사장)는 최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인지하기 어려운 재난으로 규정하며 국가 차원의 선제 대응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다.


당장 의료용품 공급 위기를 구조적 위기로 판단하고, 재고 파악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소모율 분석과 범정부 통합 대응체계를 갖춘 선제적 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환자 진료에 필요한 수액이나 각종 의료물품이 제때 조달되지 않으면 수술과 시술은 물론, 일상적인 병원 의료행위마저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국 재난체계는 사후 대응 중심…사전 예방은 부재


그는 한국의 재난 대응체계에 대해 “빨리 끓고 빨리 식는 구조이자, 사후 출동에 맞춰진 시스템”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재난의학은 응급의학 교과서 몇 개 챕터에 머무는 분야가 아니다. 전 세계 재난관리 흐름은 사후 대응에서 사전 위험관리로 넘어가고 있으며 위험 평가와 자원 조정, 정책 설계, 교육, 회복탄력성까지 포괄하는 전문 학문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사고가 터진 뒤 수습하는 데만 예산과 구조가 집중돼 있다”며 “우리 시스템 강점은 사고 발생 시 즉각 대응하는 적시성(Just-in-time)에 따라 현장에 빠르게 투입되는 데 있지만, 그 이후가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번 공급망 문제도 장기적으로 벌어지는 아주 큰 복합적인 재난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특히 이번 의료물품 공급 문제도 당장 눈앞에서 ‘땅’ 하고 사고가 나타나진 않고 있어 오히려 걱정된다”라며 “조기 경보가 돌지를 않으니 인지 자체가 느려지고 그러는 동안 위험은 계속 누적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나중에 일선 병원들이 피부로 한 번에 느꼈을 때에는 이미 너무 늦는다”면서 “일선 병원들이 이런 사실을 명확하게 알고있지 모를까봐 조바심이 난다”고 우려했다.


그는 다수 사상자 사고 현장에서 드러나는 구조적 한계도 짚었다.


재난의학은 단순히 참사 현장에 국한된 지식이 아니라 공급망 불안, 감염병, 에너지 위기, 군사적 긴장처럼 의료 시스템 전반을 흔드는 구조적 위협에 선제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현장 의료 책임자는 대개 관할 보건소장이 맡지만, 인파가 몰리고 환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보건소장에게 도로를 무정차 통제하거나 인도를 통제할 권한은 없다”며 “반대로 그 권한을 가진 상부 통제단이나 결정권자들은 의료적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 적시에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큰 괴리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는 해법으로 ‘총괄 의료조정관(Chief Medical Coordinating Officer)’ 개념을 제시했다.


재난안전 관리를 총괄하는 행정안전부 내 재난의학 전문가를 배치해 현장 의료반이 원활하게 사상자를 관리할 수 있도록 타 부처와 자원을 조정·통제하는 상위 거버넌스가 필요하단 설명이다.

헌혈중인 환자 모습. 연합뉴스.

물자 공급 위기, 재고량 아닌 ‘소모율’ 파악해야


김 교수는 현재의 물자 공급 위기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의 마스크 대란과는 결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그는 “코로나19 대유행은 수요 폭증에 따른 일시적 수급 불균형이었다면 작금의 위기는 원자재 공급의 구조적 감소에 따른 장기 재난 성격을 띠고 있다”며 “병원과 정부 자원관리 방식도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진단했다.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은 것은 소모율 분석을 통한 가시적 자원 관리 체계 가동 필요성이다.


김 교수는 “단순히 창고에 주사기가 몇 박스 남았다는 식의 보유량 측정은 큰 의미가 없다”며 “중요한 것은 각 의료기관이 현재 보유한 물자로 평시·비상·위기 단계별 진료 역량 아래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를 소모율 중심으로 분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공급망 단절 시 진료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최대 운영 가능 기간’을 데이터 기반으로 산출하는 것이 과학적 재난 대비 출발점”이라며 “이를 통해 꼭 필요한 중증환자나 수술에 자원을 우선 배분하는 등 단계별 대응 조정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또한 소모율 점검 이후에는 특정 공급원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다변화 전략 및 자원 부족 시 임상적 우선순위에 따른 기준 마련 등 행정과 임상이 결합된 대응이 즉각 뒤따라야 한다고 봤다.


민·관 합동 ‘공통상황도’ 구축 필요…결정권자 대상 지휘체계 교육 제안


김 교수는 보건당국과 범정부 차원 컨트롤타워 구축도 강하게 주문했다.


그는 “이 사태는 보건복지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산업통상자원부 같은 수출입 부처, 민간 제조사까지 함께 대응해야 하는 복합 재난”이라며 “정부가 민·관 합동 공통상황도(Common Operating Picture) 구축을 주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개별 기관 모니터링을 넘어 국가 전체 의료물자 수급 현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통합 모니터링체계가 필요하다”며 “이상 징후가 발생하면 즉시 공유해 자원 불균형을 막고, 지역 간 공동 활용이 가능하도록 행정적·기술적 플랫폼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그는 “불필요한 시장 혼란이나 사재기를 부추기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라며 “이번 공급망 위기를 대한민국 의료체계의 ‘재난 회복탄력성’을 점검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며, 환자 안전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정부와 의료계, 국민 모두의 인식 전환 필요성도 제기했다. 심폐소생술 교육처럼 재난의 사전 준비와 사후 대응에 대한 교육 역시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시장·도지사·장관 등 의사결정 주체들을 위한 기본 교육과 운영체계 훈련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AI(인공지능)를 활용한 도구가 인지 지연(human error)을 줄이고 골든타임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봤다.


김 교수는 “심폐소생술을 누구나 알아야 하듯, 재난 상황에서 시장 등 주요 이해관계자들이 기획·재무·물류를 어떻게 배분하고 의료진을 어떻게 지원할지에 대한 ‘시스템 작동 교육’이 상설화돼야 한다”며 “현장 구조대원이나 일선 의사들만 교육해서는 재난을 막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재난의학은 가용 자원을 넘어서는 위기 상황에서 예방 가능한 사망을 최소화하는 필수 학문”이라며 “하지만 중요성에 비해 사회적 인지도와 국가적 지원, 예산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지자체장이나 행안부 장관 같은 고위 결정권자들이 모두 재난의학을 깊이 공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AI를 활용한 ‘디시전 메이킹(의사 결정) 툴’ 도입도 충분히 검토할 수 있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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