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한의사협회(이하 한의협)가 사용을 원하는 의료기기 범위를 명확히 하며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위한 ‘전략적 후퇴’의 길을 선택했다.
이진욱 한의협 부회장은 6일 국회 복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장에서 열린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확대 관련 공청회'[사진]에서 “현대 의료기기 중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사용하는 의료기기를 제외한 ‘진단’ 의료기기 사용을 원한다”며 그 범위를 분명히 했다.
‘현대 의료기기’ 사용이라는 포괄적 개념에서 ‘진단’ 의료기기, 그 중에서도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사용하는 의료기기를 제외하며 범위를 구체화한 것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CT나 MRI 등을 다루는 영상의학과 전문의에 대한 전문성을 존중한다“며 ”현행법상 이들 전문가가에게만 사용이 허가된 의료기기를 제외한 나머지 진단 의료기기 허가를 요구한다"고 말했다.
다소 모호했던 현대 의료기기 사용 범위를 진단 의료기기로 한정한 것은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 필요성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그간 한의사가 사용을 원하는 현대 의료기기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았다. 진단 의료기기에 한정하는 듯하면서도 최근 배포한 각종 자료에도 ‘현대 의료기기’라고 표현했을 뿐 ‘진단’ 현대 의료기기라고 명기하지 않았다.
금년 1월 김필건 한의협 회장은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사용 가능한 몇 가지 의료기기를 나열하는 접근이 아닌, 한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과학적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현대 의료기기 사용을 제한하지 않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며 범위를 모호하게 피력했다.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이 한의협 의견을 반영해 발의한 한의약법(2013년)에도 ‘한의사는 현대적 의료기기를 사용할 수 있으며, 누구든지 정당한 사유 없이 한의사의 현대적 의료기기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방해해서는 안된다’며 의료기기 범위를 한정하지 않았다.
이같이 한의사가 사용을 원하는 의료기기 범위가 명확하지 않아 이날 새누리당 문정림 의원이 “한의사가 사용을 원하는 의료기기가 무엇이냐”며 질의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공청회에 진술인으로 참석한 김태호 한의협 기획이사는 “한의협의 주장은 언제나 일관됐다. 한의협은 전문의가 사용해야 하는 의료기기를 제외한 진단 의료기기 사용을 원했고, 치료용 의료기기 몇 개에 대해서는 법원 판단을 통해 사용 가능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의협은 애초 진단 의료기기 사용을 주장해왔으며 이번 공청회를 계기로 그 범위를 축소한 것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그 외 이날 공청회에서는 한의사 진단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각종 쟁점이 부상하며 다시금 의협과 한의협의 좁혀지지 않는 입장 차이가 재확인됐다.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할 준비 됐나=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쟁점은 한의사의 의료기기 사용에 대한 준비 여부다.
김윤현 대한영상의학회 의무이사는 “현대 의료기기 사용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경험과 임상을 거쳐 이뤄지는 의학적 판단이 뒤따라야 한다”며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의 부적절함을 강조했다.
김준성 가톨릭대학교 재활의학과 교수 역시 “현대의학에 대한 교육, 특히 실습이 부족하다”며 “X-레이를 찍어도 한방병원에서 제대로 판독할 수 있을지, 오독 등 안전성 문제가 해소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용익 의원도 “내가 의사인데 의과대학을 나와 해부학과 병리, 약리를 공부했지만 사진을 판독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다”며 “별도의 수련이 필요하다. 배웠으니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김 기획이사는 "한의사들은 6년 동안 한의과대학 교육을 통해 충분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며 "한의사의 진단 의료기기 사용은 과학과 문명의 발전으로 개발된 도구를 활용해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진단을 내려 한의학적인 치료를 행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부회장은 "'한의사 직무기술서'를 보면 혈액검사 및 X-레이 등의 영상진단이 포함돼 있다. 의사협회 연구자료에도 한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의 75% 가량 유사한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며 의료계 주장에 반박했다.
그는 “최신 기술 습득을 위해 의협과 같이 협회나 학회에서 보완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이는 의료계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의료계 제기 ‘의료일원화’= 의료계는 이번 공청회에서 의료일원화 이슈를 꺼내들었다. 양측 모두 의료일원화에 대해 긍정적인 뜻을 비쳤지만, 각론에서는 큰 차이를 보였다.
김 의무이사는 “한의학은 광의로 의학의 일부이고, 한방 의료는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관리하는 의료행위 수단의 일부”라며 “의료와 한방의료가 동시에 활용될 경우 진료와 비용 측면에서 상승효과를 나타낼 것인 만큼 의료일원화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전했다.
이어 “한의학의 비과학적인 부분 제외하고 순수 한방 의료행위를 한다면 현대의학에서 보완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도 "현대의료기기 사용은 의료일원화가 돼야 가능한 일이다. 모든 문제의 근본 원인은 유래 없이 이원화된 의료제도 때문“이라며 ”바람직한 미래를 위해서는 큰 틀에서 면허복수제, 의-한의대 통합 등을 통해 일원화 방법에 대해 논의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부회장은 “한의학과 의학이 협업을 하다가 상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좋지만, 의료계가 주장하듯 의학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한의학을 의학으로 통일하겠다는 일원화는 부적절하다”고 전했다.
■갈등 해결 주체= 김 의원은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허용 관련 갈등 해결 주체를 이해 당사자인 의협과 한의협으로 지목했다.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정치·경제적 판단이 가능하지만 의학적 판단이 가장 핵심적 기준이 된다는 의미다.
김 의원은 “한쪽은 요구하고 나머지 한쪽은 반대하는 등 갈등만 반복하면서 책임성 있는 자율적 결정을 미루고 있다”며 “지금 의사와 한의사 전문가 단체는 전문성을 갖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제일 좋은 것은 정부나 국회 개입 없이 양 단체가 스스로 협의하는 것이다. 협의체를 구성해서 10년이든 20년이든 자신들이 결정해 국회와 정부에 가져오면 그것은 국민들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이 거부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이에 김 교수는 “한의사 의료기기 사용 저지를 위해 많은 연구가 이뤄졌고, 에너지를 낭비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왜곡된 의료 체계도 같이 정비돼야 한다”고 피력했다.
김 기획이사는 “전문가 그룹에서 논의하는 게 맞지만 의협과 한의협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밥그릇 싸움이 아닌 객관적인 사람들이 합리적으로 결정하길 바라는 것”이라며 바람을 드러냈다.
한편, 의료계와 한의계는 곧 모습을 드러낼 한의사 의료기기 관련 TF에 참여, 보다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해 나갈 예정이다. 이 TF에서 이들 쟁점이 해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