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들은 전체 암 사망의 약 4분의 1이, KRAS가 속한 RAS 계열 유전자 돌연변이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KRAS 유전자에 돌연변이가 생기면 세포 증식 등을 자극하는 세포 신호 경로가 활성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KRAS 유전자가 활성화에 관여하는 특정 단백질 억제제, 즉 MEK 효소 억제제를 쓰면 이 신호 경로를 차단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약은 암세포만 죽이는 게 아니라 정상 세포와 조직에도 강한 독성을 보인다. 암세포의 신호 경로를 억제하는 데 필요한 용량을 맘대로 쓸 수 없다는 뜻이다.
MEK 억제제의 이런 용량 제한적 독성(dose-limiting toxicities)은 눈, 피부, 위 등에 심한 부작용을 일으킨다. 과학자들을 괴롭혀 온 이 난제가 마침내 풀릴 것으로 보인다.
RAS 계열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생긴 암세포에서 다량의 '2가 철'(ferrous iron)이 발견된 것이다. 이는 암세포가 일종의 '철분 중독'(ferroaddiction)에 빠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
의약품에 함유된 철분은 대부분 비 헴철(heme iron)인데 환원 정도에 따라 2가 철((Fe2+)과 3가 철(Fe3+)로 분류된다.
철분이 체내 흡수되려면 소장의 2가 금속 이온통로를 지나야 하므로 2가 철 형태로 존재해야 한다. 이 발견은 건강한 조직을 해치지 않고 암세포에만 MEK 억제제 등을 전달하는 치료법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의 애덤 R. 렌시오 약물학 화학 교수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지난 9일(현지 시각) 국제학술지 '실험 의학 저널'(JEM)에 논문으로 실렸다. 렌시오 교수는 에릭 A. 콜리손(Eric A. Collisson) 교수와 함께 공동 교신저자를 맡았다.
KRAS 유전자가 속한 RAS 계열 종양유전자엔 HRAS 유전자와 NRAS 유전자도 포함된다. 종양유전자는 말 그대로 돌연변이가 생겼을 때 정상세포가 암세포로 변하게 하는 유전자를 말한다.
예컨대 KRAS 유전자는 K-Ras라는 단백질의 생성 코드를 갖고 있다. 이 단백질은 세포의 성장, 분열, 분화 등을 지시하는 외부 신호를 세포핵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연구팀은 KRAS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생긴 종양에서 철분 흡수와 대사에 관여하는 유전자 활성도가 유난히 높다는 걸 알아냈다. 췌장관 세포 암의 경우 철분 흡수 유전자의 높은 발현 도와 환자의 생명 단축이 연관돼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런 PDA 환자의 종양을 놓고 PET(양전자 단층촬영) 검사를 해 보니 산화 상태의 2가 철 수치가 매우 높았고, KRAS 유전자가 이런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팀은 2가 철과 연계한 활성 약물(FeADC)을 이런 유형의 종양세포에 선별적으로 투여할 수 있으리라는 가설을 세웠다. 이 아이디어는 2가 철을 표적으로 작용하는 항말라리아 약에서 나왔다.
실제로 말라리아 기생충이 적혈구에 침입해 헤모글로빈을 분해하면 다량의 '유리 헴철'(free heme iron)이 생성된다.
렌시오 교수팀은 미국 식품의약국(FDA) 승인을 받은 MEK 억제제 '코비메티닙'(cobimetinib) FeADC 버전을 합성하는 데도 성공했다.
TRX-코비메티닙으로 명명된 이 시험약은 인간의 피부와 망막 등에 거의 독성을 보이지 않으면서 KRAS 돌연변이 암세포 내에서 활성화됐다. 이렇게 KRAS-MEK 신호 경로가 막히면 암세포도 성장을 중단했다.
이 시험약은 동물 실험에서도 정상 조직을 손상하지 않은 채 유사한 항암 효능을 보였다.
콜리손 교수는 "KRAS 유발 암의 철분 중독을 약물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발견은, 치명적인 암을 치료하는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라면서 "FeADC 버전을 디자인하고 개발하고 임상시험 하는, 실행과 일반화가 모두 가능한 접근법을 통해 가능할 거로 본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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