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관님
2000.01.02 03:38 댓글쓰기
', 그렇다면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을 따르지 않으셨던 겁니까?'

노무현 정부의 보건복지호를 이끌고 갈 김화중 장관(58)은 부임하면서 군수 남편을 둔 장관으로 화제에 올랐다. 정작 보건복지부에서는 그보다 '딸딸이 엄마'로 더 유명하다. 직원들은 김장관에게 '딸딸이 장관'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김장관이 딸만 넷을 가진 데서 비롯된 별명이다. 직원들은 김장관의 자녀 이야기를 하면서 "김장관이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을 어긴 장본인인데 어떻게 산아정책을 펼 수 있겠느냐"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물론 직원들의 이 말에는 김장관의 처지를 이해하는 애정이 담겨 있다.


김장관의 신혼시절인 70년대 초 당시 보건복지부의 주 정책은 산아제한이었다. 정책 슬로건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다. 그런데 김장관은 이를 지킬 수 없었다. 나름대로 기구한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장관은 서울대 간호대 3학년 재학 시절 '향토개척단'이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했다. 거기서 지금의 남편인 고현석 전남 곡성군수(60)를 만나 지난 69년 결혼했다. '농민들과 삽으로, 호미로 일하고 싶다'는 신조를 가진 법대생에게 빠져 '한 이불 덮고 자는 사이'로 발전했다.


캠퍼스 커플로 결혼까지 한 김장관 앞에는 쉽지 않은 결혼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인 고군수는 7남매의 장남인 데다 5대 장손이었다. 김장관은 전형적인 '종갓집 맏며느리'가 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종가집 맏며느리에게 부여된 제1의 임무는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쑥 낳는 것이었다. 매년 치러야 할 제사만도 열건이 넘었다. 당연히 시부모의 장손자 출산에 대한 기대도 남달랐다.


이런 실정에서 김장관은 결혼 1년 뒤인 70년 첫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맏딸 은강에 이어 선강과 진강을 낳았다. 모두 딸이었다. 79년 미국 컬럼비아대학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김장관은 이미 '딸딸이 엄마'였다.


81년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장관은 30대 중반의 나이에 한번 더 '아들 낳기'에 도전했다. 남편인 고군수는 "시부모님이나 나보다 오히려 부인이 아들 욕심이 있어 '한번만 더 아이를 낳아보자'고 제안했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리고 81년 기다리던 아이를 낳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딸이었다. 이름은 현강으로 지었다. 고군수는 "내가 채식을 해서 그런지 아들 복이 없었다"며 웃어넘겼다. 현강씨는 현재 이화여대 의대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늦둥이 현강씨를 제외한 세 딸은 모두 출가했다.


이후 김장관과 고군수는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기로 합의했다. 오히려 고군수는 아들을 못 가진 아쉬움보다 장손이라는 자신의 특수한 처지 때문에 몸고생, 마음고생을 한 김장관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고군수는 "연애시절에도 내가 장손이어서 이로 인한 고생을 시키지 않을까 하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고 털어놓았다. 고군수는 "요즘은 막내딸 키우는 재미에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다"고 전했다.


고군수는 "부인이 장관이라고 해서 내 일하는 데 불편하거나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부인이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오히려 자랑스럽다. 평소의 소신대로 해나가면 문제없을 것이다"며 아내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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