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열풍과 '필수의료 붕괴' 아이러니
박대진 데일리메디 편집국장
2023.03.31 10:37 댓글쓰기

푹~푹 찌던 지난 2006년 여름. 서울 강남의 한 입시학원 모의면접에 면접관 자격으로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는 의학전문대학원 열풍이 한창이었던 탓에 의전원 입시학원들도 성행하던 시기였다. 의전원 관련 취재에 몰두하던 차에 학원으로부터 의뢰가 들어왔고 호기심에 응했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입시학원은 수려한 인테리어로 시선을 사로잡았다. 강의실에 마련된 모의면접실도 제법 격(格)을 갖춘 모습이었다.


이공계열 재학생과 졸업생 20여 명을 대상으로 모의면접을 진행했다. 의전원 진학을 위해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거나 자퇴한 학생들도 상당수였다.


“본인 전공을 포기하고 의전원을 진학하려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극히 식상한 질문이지만 꼭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역시나 수험생들의 답은 천편일률적이었다. 시쳇말로 ‘Chat GPT’에 버금가는 모범답안 일색이었다.


“지금의 전공을 의학에 접목시켜 다양한 발전을 이루기 위해 의전원에 진학하고자 합니다.”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의사과학자가 되고자 합니다.”


면접관과 수험생 모두 알고 있는 그 답변(?)은 뒷풀이 자리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의사, 좋잖아요. 요즘은 고소득 전문직이 답이죠.”


얼마 전 ‘초등생 의대 입시반’ 보도를 접하면서 그 때의 생생한 기억을 소환했다. 당시에도 심상찮던 의대 열풍이 초등학생들까지 삼키고 있다는 소식에 놀라움과 먹먹함이 교차했다.


‘성공 보증수표’로 통하는 의대 인기는 이제 ‘신의 영역’이라는 표현이 방증한다. 이미 대학입시에서 서열 최상위에 자리한지 오래다.


일명 ‘의치한약수’(의대·치대·한의대·약대·수의대)로 대변되는 의약학 계열은 성적 최상위 1% 학생들을 무서운 속도로 빨아들이고 있다.


전국 수석을 차지한 수재들은 공식처럼 의과대학에 진학한다. 치열한 입시현장에서 인재 쏠림에 대한 우려는 울림 없는 메아리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제 소위 ‘SKY’로 불리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재학생들까지 의대를 위해 자퇴를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실제 입시 전문기업 종로학원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학생 1874명이 중도탈락했다. 이중 무려 75.8%가 자연계열이었다.


종로학원 측은 전문직 선호 현상에 따라 이들 대부분이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 등 의약학 계열 진학을 위해 반수, 재수 등을 택하며 빠져나간 것으로 분석했다.


눈에 띄는 점은 이 같은 현상이 점차 가팔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3개 대학 자연계 중도탈락자 수는 2020년 893명에서 2021년 1096명, 2022년에는 1421명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수험생과 재학생,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의대앓이’를 하고 있으니 이쯤되면 열풍을 넘어 광풍이라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문제는 의사 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정작 사람의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는 붕괴 위기라는 점이다.


매년 3000명 이상의 의사가 배출되지만 삶의 질을 중시하는 젊은세대들이 힘겨운 진료과목을 기피하면서 ‘풍요 속 빈곤’이라는 기현상이 연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젊은의사들의 선택을 질타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필수의료=고행(苦行)’이라는 공식을 만든 위정자들이 지탄 받아야 한다.


생명을 살리는 필수의료의 중요성을 오랜세월 간과해 온 결과물이다. 하지만 뼈저린 반성을 하는 주체는 찾아 보기 어렵다.


더욱 통탄할 일은 필수의료 붕괴 본질은 외면한채 의과대학 신설과 정원 확대에 시동을 걸고 있는 점이다.


기피과 인력난과 업무 가중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내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 수만 늘린다면 입시시장의 의대 광풍에 기름만 붓는 격이 될 게 자명하다.


응급수술에 야간당직이 일상인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를 진학하는 이들은 없다.


실제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의대생 24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결과 필수의료를 지망하지 않는 이유로 △삶의 질(67.1%) △의료사고 부담(64.4%) △업무 강도(61.1%) 등을 꼽았다.


‘의과대학 열풍’과 ‘필수의료 붕괴’ 아이러니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단초다. 최상위 1%인 수재들이 사람을 살리고 싶어할 수 있는 의료환경 조성이 절실하다.


기회가 올런지는 모르겠지만 다시금 모의면접관으로 수험생들과 마주한다면 꼭 묻고 싶다. “얼마나 희생할 각오가 돼 있습니까?”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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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선 08.06 04:50
    의사 만나기가 수도권지역은 너무 쉽고 ,진찰비도 적다.  싼게 비지떡이라고 그러니 의사도 많은 일을 해야하고... 결국 한가한 보건복지부, 심평원 공무원이 진정한 승리자인듯.
  • 도재봉 07.25 04:50
    사명감을 가지고 생명을 살리는 필수과를 하려 해도 평생에 의료사고 한번만 나면 인생 종 치는데 누가 할까 법의 잣대가 얼마나 엄격하고 무서운데 그리고 판사들 판결 보면 의사들 엿 먹어봐라 이런 것도 일부 있다. 이런게 탁상행정 때문이다. 물론 대학입학면접 때는 고기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입학하고 싶다고 하지만 현실의 벽에 부디쳐서 싹 다 포기하고 인기과 못하면 일반의로 하는 듯. 의대증원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닌 듯.
  • 03.31 14:41
    과학기술인에 대한, 수술하는 의사에 대한 존경심을 소득으로 표현해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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