봇물처럼 발의 '의료기관 갑질 방지법' 그러나···
정숙경기자
2018.03.29 12:12 댓글쓰기

“곧바로 신고를 해야지 수 개월간 폭행당했다는 게 말이 되냐. 바보 천치도 아니고, 싫으면 왜 거절을 못해.”


업무상 위력에 의한 폭행·폭언이 연일 이슈다. 피해자의 고통은 논외가 되고 가해자의 지배력 행사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신조어라고 생각했던 ‘태움’이라는 단어는 어느 새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현실의 문화가 돼 버렸다.


의료계 내에서는 전공의들과 관련된 폭행이 대표적이다. 교수와 전공의는 업무상 고용관계가 확실치 않지만 물리적인 강압을 동원한 것도 모자라 심리적으로 피해자를 통제하는 모습까지 드러내며 공분을 샀다.


전공의 시절, 수 년 간 교수로부터 폭행을 당해 ‘제발 도와달라’며 국회에서 마이크를 잡고 울부짖었던 한 젊은 의사는 “폭행을 당하고도 당시에는 그 교수를 적으로 만드는 게 너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국회에서 전공의 폭행, 태움 문화 등을 근절하기 위한 이른바 ‘의료기관 내 갑질 방지법’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법안을 발의하는 국회의원 저마다 이름은 달리하면서도 골자는 비슷하다.


하지만 유사한 법을 이미 만들어 놓고도 1년이 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들린다. 지난 19대 국회부터 줄곧 발의됐지만 다수 국회의원들의 무관심으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그 해 10월 더불어민주당 한정애 의원이 발의한 근로기준법 일부개정안(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 그리고 같은 해 민주당 정춘숙 의원과 정의당 윤소하 의원이 발의한 보건의료인력지
원특벌법안이 대표적이다.


올해 1월에는 자유한국당 김승희 의원이 ‘간호인력 양성 및 처우 개선법’을 내놨다.


만약 관련 법안들이 제때 통과가 됐더라면 지난 설 연휴 첫날 죽음을 선택했던 서울대형병원 간호사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 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결국 간호사의 죽음 이후 빛을 보지 못한 법안들로 국회는 다시 한 번 채비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났을 때 반짝 주목을 받을 뿐 회기 말, 폐기 처분을 면치 못했던 현실이 재현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최근에는 민주당 강병원 의원이 ‘직장 내 괴롭힘 방지 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했으며 바른미래당 최도자 의원은 신입직원의 정신적·신체적 자유 구속을 금지하는 일명 ‘신입직원 태움 금지법’을 발의했다.


정의당 윤소하 의원도 뒤질세라 ‘의료기관 내 괴롭힘 방지법’을 내놨다. ▲의료기관 내 괴롭힘 행위 정의 구체화 ▲괴롭힘 발생에 따른 기관장 및 개설자 조치 ▲의료기관 인증기준에 괴롭힘 예방 활동 여부를 추가하는 내용 등을 담은 의료법 일부개정법률안이다.


서울 수도권 소재 A대학병원에 근무 중인 한 간호사는 “간호사 태움방지법과 함께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는 보건의료인력지원특별법이 최우선으로 제정돼야 한다”며 “간호인력 문제는 폭발 직전 단계”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회가 이제 더 이상은 지체 없이 관련 법안들을 통과시키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부와 병원계, 간호계도 보건의료인력의 운영 실태를 전면적으로 조사해야 하는 일에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환자를 보듬고 치유하는 전공의와 간호사들에게 병원은 과연 안전한 직장인가. 되묻지 않을 시점에서 국회의원들의 ‘반짝’ 관심이 아닌 결실을 맺는 법안을 확인하게 되길 바란다. 그래야 의료기관도, 교수도, 간호계도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을 무너뜨리는 데 용기를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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