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로 떠나려 하는 한국 의사들 왜
2014.07.11 14:35 댓글쓰기

몇 달 전 이메일 한 통이 기자에게 왔다. 익명의 전문의 A씨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의사를 구한다는 문자를 받고 많은 한국 의사들이 지원을 하고 있다"며 관련 내용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저수가 체계 때문에 의사들이 과잉진료, 비급여 진료를 환자들에 강요하게 됐고, 결국 이 같은 실상에 염증을 느낀 많은 의사들이 우리나라를 떠나려 한다는 취지의 입장을 피력했다.

 

그리고 A씨는 현재 우리나라 의료 환경에 대해 “의사들의 희생이 담보되지 않으면 지탱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처음 이메일을 받았을 때는 놀라움이 앞섰고 이후에는 의구심이 뒤따랐다. “의사들이 정말 ‘중동’으로 떠나려 할까?”라는 반신반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의구심은 접어두고 바로 취재에 들어가기로 했다. 최소한의 정보밖에 없던 터라 제보자 A씨와 어렵게 연락이 닿았고, 해당 채용을 진행하는 헤드헌팅 전문 업체도 수소문 끝에 알아낼 수 있었다.

 

결국 수일간의 취재 끝에 ‘의사 연봉 1.5배~3배에 年 60일 휴가 등 ‘파격’’, ‘열사의 땅 중동 가겠다는 한국 의사들’, ‘한국 의사들에 파격조건 내건 사우디 정부’ 기사를 4, 5, 7월에 걸쳐 연속 보도할 수 있었다.

 

첫 기사가 나간 후 개원의사를 비롯해 봉직의, 유관 협회, 병원 등으로부터 적지 않은 연락을 받았다. 실제 대다수 의사들이 해외 취업에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그 이유에 대해 궁금증이 증폭됐다.

 

그래서 이메일로 문의를 해온 20여명의 의사들에게 무작위로 설문조사를 시행했다. 그 결과 몇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고, 이들이 왜 사우디행을 결심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우선 사우디 채용 공고에 관심을 보이는 대다수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앞으로 일할 시간이 많이 남아 있는 30대 젊은 의사라는 점이었다. 전공은 영상의학과, 소화기내과, 안과, 신경외과 등으로 다양했으며 치과도 있었다.

 

또 하나 이들에게서는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가장(家長)으로서 삶의 무게였다. 국내 의료 현실을 극단적으로 진단하는 이와 사우디 취업을 계기로 이민까지 고려하는 이도 있었다.

 

설문에 대해 눈에 띄는 답은 B씨와 C씨의 것이었다. 30대 B씨는 “우리나라 의료 현실에서 교과서적으로 환자를 보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면서 “심평원이라는 거대한 조직 앞에서 의사는 그저 따를 수밖에 없는 개인에 불과하다. 의사들이 적극적인 저항을 시도하기에는 이미 잠재적 범죄자라는 편견이 만연해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의사들이 해외 취업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현 상황에 대한 소극적 저항이다. 전문가로서 의견이 묵살당하고 잘못된 제도를 바꿀 수 없는바, 회피라는 방법의 소극적 저항”이라고 피력했다.

 

 

40대 후반 C씨는 조금 더 극단적으로 내다봤다. 그는 “외국에서 근무하며 영어 실력을 키워 호주 의사시험에 도움을 받고, 궁극적으로 이민을 가고자 사우디 의사 채용에 관심을 보이게 됐다”고 설명했다.

 

C씨는 “우리나라 의료는 완전히 무너지고, 외국에 의존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료 생태계 파괴’라는 실패가 있지 않고서는 바뀌지 않을 것”이라 내다봤다.

 

의료계가 수없이 외치던 ‘의료민영화 반대’, ‘수가 현실화’가 살갗으로 느껴지는 답변들이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대한의사협회 신현영 홍보이사는 “우리나라의 척박한 의료환경 때문에 많은 젊은 의사들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는 브레인 드레인(두뇌유출) 현상으로 정부 차원에서 관심을 갖고 국내 의료 시스템의 문제점을 되짚어봐야할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모든 의사들은 소위 호의호식(好衣好食) 집단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예전과 다른 의료환경 변화에 따라 자살, 이민 등 선택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30~40대 의사들이 떠나려 한다. 더 이상 녹록치만은 않은 현실에서 스스로 어쩌면 빨리 새 살길을 찾는 것이 정답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30대 중반 정신과 전문의 D씨의 마지막 한 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적어도 해외에서는 3분 진료를 하지 않아도 되고,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진료해도 삭감 당하지 않을 거에요. 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적 여유도 있을 것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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