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정의학회 "한국, 1차의료 중심 정책 재편 필요"
한병덕 고대안암병원 교수(대한가정의학회 홍보이사)
2025.05.12 05:17 댓글쓰기

금년 4월 세계가정의학회(WONCA) 아시아태평양지역 협의회는 부산에서 열린 학술대회를 앞두고 '한국 일차의료 강화 및 의료계 지원'을 주제로 한 장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번 성명은 우리나라에서 정부와 의료계 간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해외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성명을 채택했다는 측면에서 적잖은 울림을 줬다.


"일차의료, 국민들이 처음 만나는 의사 이상 역할 수행" 


WONCA는 성명서에서 일차의료가 단지 처음 만나는 의사 역할이 아닌, 국민들 생애 전(全) 주기에 걸친 건강을 지키는 핵심 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예방 중심 및 지역사회 기반 의료시스템 없이는 지속 가능한 건강보험은 물론 팬데믹 대응도 불가능하다.


특히 성명은 “가정의학 전문의는 강력하고 회복력 있는 보건의료체계 중심”이라고 천명하며 한국 정부와 보건의료 리더들에게 일차의료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정책적 전환을 촉구했다.


대한민국 부산에서, WONCA가 외친 이 성명이 던지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정부는 일차의료 가치를 인정하고 국민 건강을 수호하기 위해 정책적 지원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OECD 국가 중에서도 가장 외래 진료 횟수가 많은 나라다. 인구 1인당 연간 외래 진료는 약 14.7회로 OECD 평균의 두 배를 넘는다. 


반면 정부는 인구 대비 의사 수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의대 정원 확대 정책을 추진하고 있으나, 의료계 내부에서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강한 반발이 있다. 과도하게 많은 진료가 시행되고 있는 나라에서 의료접근성 문제를 제기하는 정부의 주장에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또 전체 외래 환자 72%는 의원급 의료기관을 이용하지만, 중증도가 낮은 질환도 대형병원으로 집중되는 현상은 여전하다.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하는 외래 환자 비율은 약 6.2%로 보고됐지만, 이들이 전체 의료비와 자원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문제다. 


"일차의료 가치 정당하게 보장 못해 진료의 질적 및 양적 불안정성 심화"


이는 의료전달체계 부재와 일차의료 기능 약화를 보여준다. 일차의료 가치를 정당히 보장하지 못하니 일차의료 진료의 질적, 양적 불안정성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  


반면 영국, 캐나다, 일본 등은 가정의 등록제, 의뢰·회송 시스템, 지역중심 보건네트워크를 통해 1차 의료를 제도화했다. 


그들은 국민이 먼저 찾는 의료 입구를 작고 따뜻한 진료실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예방하고, 상담하고, 돌보며, 필요한 경우에만 상급병원으로 보내는 체계다. 한국은 이러한 ‘입구’를 제대로 설계하지 못했다. 대신 출구만 넓힌 결과, 의료체계는 과도한 진료와 경쟁에 허덕이고 있다.


부산 성명서는 단순한 원론적 지지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시급한 구조 개혁을 실행하라는 권고다. 부산 성명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던진다. 


첫째, 예방 중심·지역 기반 진료를 보장할 정책적 투자가 필요하다. 둘째, 국민 모두에게 신뢰할 수 있는 주치의를 보장해야 한다. 셋째, 공정한 수가체계와 인력 지원 없이 일차의료는 지속될 수 없다. 넷째, 정부와 의료계는 대립이 아닌 협력적 파트너십을 회복해야 한다.


한국이 이 권고에 응답하지 않는다면, 일차의료 기능은 더 약화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환자에게 돌아간다. 결국 일차의료는 의료계와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 건강을 지탱하는 기본 구조이자, 보건의료의 마지막 안전망이다.


WONCA 부산 성명은 한국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 ‘국제적 거울’이었다. 이제 우리는 이 거울을 넘어서야 한다. 일차의료를 강화하는 것은 곧 국민 건강을, 의료 미래를, 그리고 공동체 회복력을 키우는 일이다.


병원이 아닌 동네에서, 진료보다 상담에서, 치료보다 예방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의료 길. 그 길을 향해 이제는 한국이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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