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에 대한 합리적 의심
박광주 교수(아주대병원 호흡기내과)
2016.08.23 19:55 댓글쓰기

급성 호흡곤란증후군 원인
 

미국에서 장기 해외 연수를 시작한 2004년이었다. 비염과 아토피가 심한 딸을 위해 전자 제품 전문점에 들러서 가습기를 샀는데 보통 우리가 쓰는 초음파식 가습기와 좀 달랐다. 이는 증발형 가습기로 물 위에서 팬을 돌려 가동하는 방식이라 수증기가 잘 보이지 않고 소음이 상당히 컸다.

결국 다음날 한국계 대형 슈퍼를 찾았다. 아니나 다를까. 초음파식 가습기를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미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조용하고 수증기 잘 나오는 초음파식 가습기를 잘 안 쓰는지 의아했다.


가습기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단순히 물을 데우는 원리인 가열식, 팬으로 수분을 방출하는 증발형 같은 것이 있고 우리가 주로 사용하는 초음파식 가습기는 물을 진동시켜 수증기를 발산하는 방식으로 전력 소모가 적은 데다 분무량이 많아 가습 효과가 높다.
 
반면 과도하게 수분을 방출할 수 있고, 세균이나 독성 물질이 바로 공기 중에 유출되기 쉬워 세척을 자주 해야 한다. 사람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넣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기에 수증기만 발산하는 증발형이 보건·위생상으로는 더 안전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살균제 사용의 필요성도 적고 사용하더라도 방출량이 매우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흡기는 외부 환경에 직접 노출되는 기관이어서 유해물질 등에 의해 염증이나 손상이 발생하기 쉽다. 그래서인지 유독 우리나라에서 가습기 살균제가 다량 사용된 것은 수증기가 많이 발생해 빠르고 확실하게 가습이 되는 제품을 선호하는 한국 소비자 특성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여러 가습 방법의 장·단점과 관리 수칙 그리고 초음파식 가습기의 잠재적인 위험에 대한 홍보·교육이 부족한 것도 요인이 될 수 있다.
 
2011년 7월에 다수의 임산부를 포함한 10여 명에게 원인 미상의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이 발생하자 그 원인을 밝히기 위한 조사가 시작됐다.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은 양측 폐에 염증성 액체가 광범위하게 차는 폐 부종으로 산소 부족이 오며, 진행하면 돌이킬 수 없는 폐 손상과 폐 섬유화를 초래하는 매우 치명적인 증후군이다.
 
원인은 폐렴, 패혈증, 심한 외상, 대량 수혈 등을 꼽을 수 있다. 당시 발병 환자에서 광범위한 검사를 시행했는데, 역학 조사와 동물 실험 등을 통해 가습기 살균제가 원인임을 알아냈다고 한다. 담당 의료인과 질병관리본부 등 유관 기관 담당자들의 많은 노력이 만들어낸 값진 결과라고 생각한다.


이제 ‘합리적 의심’을 해야 할 때


법률 용어로 ‘합리적인 의심’이란 말을 종종 사용한다. 이는 ‘유죄가 성립하려면 논리적·상식적으로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호흡기내과 의사로서 부끄러운 사실이지만 우리 가족은 당시 가습기 살균제를 몇 년간 거의 매일 사용했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아무도 호흡기 쪽으로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가습기 살균제를 정말 많은 사람이 썼고 실제 연 사용 인원은 거의 80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그런데 그렇게 사망을 초래할 정도로 호흡기에 치명적 독성이 있다면 호흡곤란 등의 증상을 느끼는 사람이 적어도 수만 명은 될 것이며, 이들이 확인이나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하는 것이 합당한 반응이었을 텐데 발표 전후에는 그렇게 큰 반향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폐 손상이 서서히 진행되며, 약제 종류나 사용 기간, 사용량, 사용 공간의 크기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전제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물론 현재는 각종 미디어를 통해 거론되며 수백 건의 소송이 진행되고 있지만 대부분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이뤄진 경우가 많다. 외국 인터넷 상거래 사이트를 보면 비슷한 성분의 약제가 아직도 버젓이 팔리고 있다.


물론 이런 물질에 호흡기가 노출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동물 실험을 거쳐 이미 논문으로도 발표된 지금에도 마음 한구석의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급성 호흡곤란 증후군이 발생한 데는 또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은 아직 못 다 맞춘 퍼즐 조각처럼 분명히 남아있다.

이는 여러 사람이 노력해 도출한 결과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유추되는 의문까지 풀어내는 것이 그 결과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또한 이러한 의문을 스스로 제기하고 또 그것을 합리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우리 호흡기내과 의사의 의무이다.


어쨌든 이러한 사태는 우리에게 또 한 번의 큰 교훈이 되었다. 앞으로 환경 위생 관리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서 우리 몸을 무방비 상태로 위험에 노출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데는 합리적 의심이 있을 수 없다. 이전에 세월호 사건이 그랬듯 큰 희생을 치른 후에야 비로소 문제를 깨닫는 잘못된 관행이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각성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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