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력대란 위기 속 정전 추억'
조정 차장(SBS 보도국 경제부)
2013.07.21 23:07 댓글쓰기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1976년 여름 어느밤. 늘상 귀가가 늦은 아버지를 빼고 우리 삼형제는 어머니가 지어주시는 맛있는 저녁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엌에서 도마를 두드리는 칼날의 울림이 빗소리와 섞여 나즈막히 전해지고 있었는데 퍼벅, 퍼벅. 한 두차례 백열등이 껌벅 거리다가 이내 툭 꺼지고 말았다. 정전이다.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둘째 동생은 익숙하게 일을 나누었다. 둘째는 갑자기 엄습한 어둠에 울음을 터뜨린 막내 동생을 달래고, 나는 선반 위에서 양초를 더듬어 꺼내 팔각 성냥으로 희미하게 불을 밝혔다. 부엌의 어머니도 어느새 양초 불을 켜고 다시 저녁 준비를 하고 계셨다.


무슨 기분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직 어린 나이였던 나는 정전으로 칠흙같은 어둠이 펼쳐지면 약간의 두려움과 함께 묘한 안락함을 느끼곤 했다. 세상에 빛이 없다면 얼마나 무섭고 답답할까? 당시만 해도 머리에 뿔 달린 북괴의 침공에 대해 교육받던 터라, 전쟁이 나면 이렇게 어두운 세상이 될 거라는 상상도 했다. 그러면서도 동생들과 이불 속에 몸을 감추고 영롱한 불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것이 어머니의 품 속 같다는 포근함도 맛 볼 수 있었다.


1970년대만 해도 정전은 우리 일상 가운데 하나였다. 예고없이 전깃불이 모두 꺼져도 크게 놀라는 사람이 없었고 그저 짧게는 몇 분, 길게는 두 세시간 불편함을 견디면 그만이었다.


아이들에게 정전은 공식적으로 성냥을 만지고 불장난을 할 수 있는 기회였고, 흔들리는 촛불을 이용해 벽에 그림자 그림을 그리는 작은 추억도 선사했다. 흑백 텔레비전이 꺼지고 집 안 팎으로 암측천지가 되면 온 가족이 촛불 곁 한자리에 모여 얼굴을 마주 대고 정겹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다.


1980년 아파트로 이사했을 때도 종종 정전이 일어나곤 했다. 그때는 많은 사람들이 베란다로 나와 어둠에 묻힌 아파트 단지의 이채로운 풍경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 또래 장난꾸러기 청소년들은 베란다에서 괴성을 질러 암흑의 고요함을 깨 보기도 했고, 또 그런 장난을 앞 동 옆 동 친구들과 주고 받았던 기억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쓰고도 남을 만큼 전기가 풍족해져서 일까? 이제 정전은 추억이 아니라 재앙이자 사고다. 정전은, 아니 정전까지 가기도 전에 전력부족은 낱낱이 돈으로 계산돼 사회적 피해로 기록된다. 한차례 블랙아웃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시 그런 일이 터질까봐 두려워하고 재발 방지책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전기 공급이 원활하지 않으면 산업이 큰 피해를 입고 전기를 마음껏 쓰고 싶은 자들은 그런 권리를 누릴 수 없게 된다.

 

파리 특파원으로 프랑스에 살 때 전기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주재 발령을 받아 이삿짐을 파리로 옮기고 생활하다 보면 한국사람이 한번 쯤 겪는 일이 있다. 세탁기며, 냉장고며 가전제품이 이유없이 고장난다.


물론 한국에서만 쓸 수 있는 기종이 아니라 유럽과 한국에서 모두 쓸 수 있는 제품인데도 그런 일이 생기곤 한다. 프랑스 전기의 품질이 떨어지는게 이유라는 설명이었다. 전기에도 품질이 있는데, 고르고 안정적인 전기는 가전제품에 무리를 주지 않지만 거친 전기는 고장을 유발한다. 실제로 우리집 세탁기도 얼마 쓰지 않아 멈추고 말았다.


2013년 7월, 우리는 전기를 아껴야만 한다. 그동안 고마운 줄 모르고 전기를 펑펑 쓰고 있었는데 이제 그럴 상황이 아닌 것이다. 물론 정부와 전력 관련기관이 제대로 일을 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산업부와 한수원, 한전 등 관련기관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이면에는 전기를 무한히 쓸 수 있는 자원 쯤으로 여긴 소비자와 정책 당국자의 오판도 숨어 있다. 적정한 양의 전기를 생산해 필요한 만큼 아껴쓰는 것이 지구와 환경에도 좋은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전기 필요하다고 아우성 치면 정부가 발전소를 더 지어 수요에 맞추는, 낭비적인 구조로 전기를 소비해 왔다. 슬기롭게 이 무더운 여름을 넘기는 것과 함께 차제에 우리 전력산업의 구조 개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생각해 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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