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학 영문 'Korean Medicine' 소고(小考)
장성구 교수(경희의대. 前 대한암학회 회장)
2013.07.15 13:52 댓글쓰기

이름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가 보다. 그렇기 때문에 전해오는 말 중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고 하지 않았나? 

 

유학을 실천적 도의(道義)의 본지(本旨)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입신양명(立身揚名) 즉, 출세해서 이름을 세상에 떨치는 것을 인생의 중요한 목표로 삼았었다. 또한 이름을 잘 지어야 출세하고 건강하다는 속설로 인해 무수히 많은 작명가들이 호구지책(糊口之策)으로 사람들의 이름을 지어 주었는가 하면 아주 특별한 사람은 작명가로서 명성을 떨치고 많은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름에는 작명(作名)과 명명(命名)이 있다. 사전적 의미만을 따져 보면 작명은 이름을 짓는 것이다. 명명은 생물, 광물, 화합물, 원소 등에 국제적 규약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어떤 때는 작명이라 하고, 어떤 경우는 명명이라고 하는지 사용함에 있어서 정확한 구분이 정해져 있지는 않다. 다만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자의적으로 판단해 보면 ‘새로운 것’에 이름을 붙일 때는 작명이라 하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명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점쳐 본다.

 

1970년대 초 의과대학을 다니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 당시는 의대를 8년 또는 10년 만에 졸업하는 것이 아주 다반사 일정도로 소위 낙제를 많이 시켰다. 의예과에서 의본과로 진입하는데 절대적인 장벽, 즉 염라대왕과 같은 역할을 했던 과목이 바로 유기화학이었다.

 

내가 공부하던 때 교수님의 이론은 아주 간단했다. 유기화학의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유기화합물에 이름을 붙일 줄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시험도 여러 종류의 화학구조를 길게 써 놓고 정확하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 가장 힘들었고, 여기서 틀리면 예외없이 낙제였다. 소위 IUPAC(국제순수응용화학연합) 명명법이라는 소책자를 달달 외워야 가능했던 일이고 하도 외우고 복습을 거듭한 결과, 나중에는 재미도 있고 일정한 원칙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동기들끼리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화합물을 임의대로 길게 써놓고 IUPAC 명명법의 원칙에 따라 이름 붙이기 내기를 했던 일도 흐뭇한 옛 추억 중 하나가 됐다.

 

"사회적 단체 작명, 그 의미 매우 중요"

 

사회적인 어떤 단체의 이름을 얼마나 의미있고 멋지게 붙이는가 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실질적으로는 어떤 훌륭하고 의미있는 사회적 기여를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것이 한 단체에 대한 평가의 지표가 돼어야 하겠지만 한 단체의 철학과 이미지가 온통 배어 있는 것이 그 단체의 이름이고 보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사회단체의 작명 또는 생산품의 이름을 놓고 시시비비 다툼이 법정으로 비화되곤 한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유사명으로 사칭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종류의 비슷한 이름에 미리 특허를 신청해 명칭 사용에 대한 방어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경우 대개 원래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단체 또는 제품은 사회적인 지명도가 높은 경우가 일반적이고 유사 명칭을 사용하는 곳은 유명세를 타고 있는 단체나 제품의 이름의 유사성을 통해 이익을 보고자 하는 것이 흔하디 한 사회적 속성이다.  

 

필자가 보니 최근 이와 비슷한 사례가 우리나라 의료계에서 발생해 법적인 다툼까지 벌어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영문으로 Korean Medical Association(KMA)이라고 표기해 온지가 이미 오래됐고 아울러 이런 형태의 작명법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미국의사협회 영문 표기는 American Medical Association(AMA)이다.

 

그런데 최근 대한한의사협회가 영문 표기에 기존 사용했던 Oriental이라는 단어를 없애버리고 The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이라는 표기를 사용하므로써 법적 시비에 휘말렸다. 아마도 이는 대한한의사협회가 수년 전 ‘한의학(漢醫學)’을 ‘한의학(韓醫學)’으로 개칭한 후 과거 중국에서 발생한 의학이 아니라 한국에 근거를 둔 전통의학이라는 개념을 정립한데서 출발한 듯하다.

 

필자는 의사 신분을 갖은 사람이지만 한의학을 부정하지도 비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고유성을 발전시켜 인간의 질병 치료에 일정한 부분이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한의학이 특성을 부정하고 현대의학으로 포장하려는 시도와 한의사들이 마음에 흰가운을 입고자하는 생각에는 결단코 반대한다. 그렇게 되면 한의학의 고유성과 전통성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현대의학과 한의학은 그 뿌리부터 아주 다르다. 옳고 그름을 떠나 질병을 이해하는 방법이나 치료를 위해 접근하는 그 모든 방법이 전혀 다른 체계를 갖고 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영문 명칭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영문 표기는 당연히 외국 사람들,  특히 영어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읽어 보고 그 단체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존재하는 것이지 내국인에게 도움을 주고자 붙이는 것이 아니다.

 

"한의학 전통을 창의적으로 국제화시킬 수 있는 이름 짓는 노력 절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Medicine이라는 단어의 의미와 상징성은 무엇일까? 이 세상에 Medicine이라는 말이 생겨났을 때 서구 사람들이 이해한 것은 '의학'일 뿐이다.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말로 구태여 바꿔 표현하면 ‘현대의학’이다. 그것 이외의 어떤 것을 생각할 필요도, 생각 할 수도 없는 단순한 명사적 단어 일 뿐이다.

 

한의학(韓醫學)이 한국에서 발생한 전통의학이니까 ‘Korea medicine'이라고 한다면 medicine이라는 단어를 완전히 오용한 것일 뿐 아니라 너무도 편안한 발상이다.

 

역으로 서양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한국에서 발생돼 사람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방법이 한국에 있다는데 그 이름이 뭐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뭐라 답해야 할까 의구심이 든다. 다시 말해 전통과 고유성이 있는 한의학(韓醫學)에 구태여 서양에서 태어난 medicine이라는 말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고 볼 수 있다. 한의학(韓醫學) 나름대로 고유한 영문 표기법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의학(韓醫學)의 철학적 바탕과 치료행위의 특장 점을 살리고 합목적적으로 잘 표현된 영문 표기를 찾는 피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한의학이 지켜야 할 자존심 중 하나다.

 

인도가 자랑하는 전통의학 중에 아유르베다(Ayurveda)라는 것이 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아유르베다를 체험하기 위해 인도로 몰려든다고 한다. 이 아유르베다는 이름에서 보듯이 본연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가고 있다. 그들에게는 'Traditional indian medicine'이라는 말도 필요 없을 뿐 아니라 누가 'Indian medicine'이라는 말을 붙여 준다면 한사코 마다할 것이다. 비슷한 또 다른 예가 바로 카이로프랙티스(chiropractis)다.

 

이름은 고유성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쉽게 말해 김(金)씨는 김가고 이(李)씨는 이가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Korean Medical Association이나 The Association of Korean Medicine은 표기는 다르지만 외국인들 시각에서는 대한의사협회로 인식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혼동을 유발할 가능성이 적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은 누구를 위해 영문 이름이 존재하는지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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