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손은 약손의 비밀'
김동은 교수(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이비인후과)
2013.04.22 12:11 댓글쓰기

 

어릴 적 방학을 애타게 기다린 가장 큰 이유는 시골 외가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외손자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하셨다. 그런데 이것, 저것 맛있는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서인지 가끔 배가 살살 아플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외할머니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기도부터 하신 후, 외손자를 무릎에 누이셨다. 필자를 늘 ‘김 박사’라고 부르셨던 외할머니는 주문 같은 것을 읊으시며, 볼록한 나의 배를 둥글둥글 원을 그리며 문질러 주셨다. 마법의 주문은 바로 ‘할미 손은 약손, 우리 김 박사 배는 똥배’였다.


지금 기억에 외할머니의 손은 고목 껍질같이 거칠긴 했지만 참 따뜻했다. 외할머니의 ‘치유자장가’를 들으며 나는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면 신기하게도 씻은 듯이 나았다. 완쾌 소식을 전하기 위해 방안을 살펴보면, 외할머니는 이미 예배당에 새벽 기도를 가신 뒤였다.


이러한 ‘엄마 손은 약손’의 비밀은 무엇일까? 그동안 많은 사람은 약효가 없더라도 희망과 믿음만 있으면 병이 낫는다는 플라세보(placebo) 효과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치유의 믿음이 있으면 뇌에서 엔도르핀 등을 분비해 통증 완화 효과도 내고 면역도 높아진다. 혹자는 따뜻한 손바닥으로 배를 시계방향으로 문지르면 실제로 장운동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약손’은 단순한 플라세보 효과가 아니라는 연구 결과가 발표돼 ‘약손의 비밀’이 밝혀질 날이 가까워졌음을 알렸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연구진은 초파리 유충의 신경 다발 끝에 존재하는 ‘NOMPC’라는 단백질이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감각을 전달하는 매개체라고 ‘네이처’지에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병원에서 의사의 ‘약손’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다. 환자가 배가 아프면 배를 어루만져 보기도 전에 각종 검사부터 시행한다.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한번 만져보기도 전에 CT나 MRI를 먼저 찍게 된다. 환자들은 의사가 따뜻한 손으로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 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정작 의사들의 손은 차가운 컴퓨터 자판만 연신 두드리고 있다. 회진과정에서 ‘약손’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늦은 시간에 도는 회진은 말 그대로 ‘폭풍회진’이다. 한 환자 단체의 조사를 보니 대형병원의 환자 한 명 당 평균 회진 시간이 2분 미만이었는데,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그런데 이런 바쁜 회진 중 코를 수술 받은 환자가 복통 등 예상치 못한 다른 부위의 증상을 호소하면 난감해진다. 언제부터 어떻게 아픈지 묻고, 환자의 아픈 부위를 어루만져본 기억이 부끄럽게도 별로 없다. 전공의 선생에게 해당 과에 진료를 의뢰하라는 말만 던진 후 병실을 나오기 바빴다. 


요즘은 의사가 되려면 의사시험에서 모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기평가를 통과해야 한다. 학생들은 청진이 필요한 문제를 받으면 청진기를 자신의 입에다 대고 뽀얀 입김을 불어 낸 후 조심스럽게 모의환자의 몸에 갖다 댄다. 환자가 불편해할지도 모를 차가운 청진기의 감촉을 자신의 체온으로 덥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병원에서 청진기를 ‘호호’ 불고 있는 의사를 본 기억은 별로 없다. 


의학이 발전하면서 ‘약손’은 이제 우리가 어렵던 시절의 아련한 ‘치유의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그 ‘약손’이 가졌던 치유를 향한 의학의 인간적 측면은 기억되어야 한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손이 ‘치유의 약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손자 걱정에 밤새 배에서 손을 떼지 못하시던 외할머니의 애틋한 마음이 그 주름진 손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 손은 약손’의 비밀은 바로 이 ‘애틋한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닐까? 



관련기사
댓글 0
답변 글쓰기
0 / 2000
메디라이프 + More
e-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