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 복지정책을 바라보며
신성식 선임기자(중앙일보)
2013.04.09 18:56 댓글쓰기

 
지난해 가장 바빴던 기자들은 정치부 기자들이다. 4.11 총선과 12월 대선, 이 두 선거까지는 여당, 야당 구분 없이 양 쪽 다 바빴다. 대선 직전 안철수 후보가 사퇴하기 전까지는 야당 담당 기자들이 더 힘들었다. 대선이 끝나고서도 여당 기자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보냈다. 금년 1~3월 박근혜 정부 출범 전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정치부 기자들만큼은 아니라 하더라도 바삐 움직인 기자들이 있다. 보건복지 담당 기자들이다. 지난해 양 대 선거 내내 복지 이슈가 쟁점이 됐고 대선 이후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이슈는 묻혔고 기초연금과 4대중증질환 보장이 인수위 내내 복지 기자들을 괴롭혔다.


4대 중증질환 보장은 전문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수위에서 그대로 채택됐다. 이후 보건복지부 신년 업무보고에서도 기본 틀이 유지됐다. 의료보장본부를 신설해 6월말까지 실행 안을 내놓겠다고 보고했다. 복지부 장관에 진영 인수위 부위원장이 왔고 그가 주도하는 정책이니 바뀔 리가 없을 테지만.


공무원이야 정책이 정해지면 그 쪽으로 따라간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소신은 뒷전이었으니까. 청와대 보고에서 3대 비급여(선택진료비·상급병실료·간병비)와 관련해 유일하게 모 국장이 소신 발언을 했다.
그는 “3대 비급여 건강보험 적용은 절대 안 된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나중에 식사 때 좀 더 얘기해보자”고 넘어갔다고 한다.


복지부 공무원은 특정질환 위주의 의료보장 방식의 문제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난해 가을 세종문화회관 양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복지부가 출입기자단을 대상으로 건강보험 정책을 설명하는 연찬회가 열렸다. 거기서 복지부 공무원이 “암 위주의 보장 방식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가구 별 부담을 줄이는 쪽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 기자가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건강보험이 해주는 게 뭐가 있느냐. 그나마 암이라도 보장해주니까 환자들이 고마워하는데 그것마저 없애려 하느냐”고 비판했다. 복지부는 과장·국장·실장이 나서 그 기자와 논쟁을 벌였다. 논쟁이 한참 계속됐고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지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복지부의 입장은 그 이후 선거 과정에서도 이어졌다. 4대 중증 방식의 의료보장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해 초 인수위 보고를 앞두고 “아니 됩니다”라고 문제제기 했다가 인수위로부터 호된 질책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약 이행 방안 마련에 충실한 입장으로 바뀌었다.


박근혜 정부가 4대 중증질환 100% 보장을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됐으니 약속을 지키겠다고 하니 할 말은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약은 지킨다고는 하나 잘못된 공약은 하루라도 빨리 폐기하는 게 나라를 위해서 바람직하다.


사회보장의 기본원칙은 포괄성이다. 특정질환 위주의 보장 방식은 사회보험의 원리에 맞지 않다. 재원이 부족할 때 급한 데부터 지원할 수는 있다. 2005년 암을 비롯한 일부 질환만 보장하겠다고 했을 때 반대가 별로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 지금은 다르다. 암·심장병 등 4대 중증질환 위주의 보장은 여기서 멈춰야 한다. 이미 거기에 많은 재원이 편중돼 있다. 이 네 가지 병은 중증질환 산정특례로 분류돼 암·심장병·뇌질환은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비의 5%, 희귀병은 10%만 부담한다. 다른 병에 걸리면 20~50% 부담한다.
 

한 해 소득의 10% 이상을 의료비로 지출하는 경우를 두고 재난적 의료비라고 한다. 전체 가구의 21% 정도가 여기에 해당한다. 어떤 연구에서는 전체가구의 9.7%가 가처분소득의 30%가 넘는 돈을 재난적 의료비로 쓴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의료비 때문에 가계가 파탄 나는 일이 없어야 한다. 1인당 국민소득 2만2708달러 국가에 의료비 파산은 어울리지 않는다. 가계에 주름살을 지우는 질병은 암·심장병·뇌질환·희귀병만 아니다. 간경화·신부전증·당뇨 등 부지기수다.


암이든 뭐든 관계없이 의료비가 살림살이에 얼마나 부담이 되느냐를 따져 견딜 수 없는 사람을 구제해야 한다. 4대 중증 위주의 보장은 다분히 정치적 접근이다. 100% 보장은 정치적 구호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가 밀어붙이자 일각에서는 “어쩔 수 없다. 그거라도 먼저 제대로 해라”고 말한다. 서글픈 현실이다.


의료보장에 쓸 수 있는 돈은 한정돼 있다. 돈이 어디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곳의 지출을 줄일 수도 없다. 건강보험료를 올리든지, 국고 지원금을 늘리든지, 술에 건강부담금을 물리든지 방법이 많지 않다. 셋 다 쉽지 않다. 재원을 늘리지 않고 공약을 이행할 길이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민 부담이 늘어난다. 


박근혜 정부 방식대로 가면 누군가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된다. 한정된 재원을 사용하면서 특정 환자에게 눈물을 흘리게 해서는 곤란하다.


복지 담당 기자는 올해도 대목을 맞았다. 6월말까지 4대중증 질환 보장방안이, 8월말까지 기초연금 세부안이, 연말까지 3대 비급여 근본 대책이 나온다. 기사가 많은 것은 기자한테 나쁠 리가 없다. 그렇지만 셋 다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아닌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가지고 취재에 임하려니 별로 신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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