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조정 차장(SBS 보도국)
2013.01.14 11:58 댓글쓰기

연말연시 송년회와 신년회가 이어지는 시즌이다. 한 해의 업무를 마무리하랴 연이은 술자리 감당하랴, 몸과 마음이 힘든 계절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아무리 사회성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세밑에는 스마트폰으로 날아드는 모임 초대장을 받아들고 아련히 옛 친구들을 떠올려 본 기억이 한 두 번 쯤 있으리라. 필자도 대통령 선거 등 바쁜 업무로 상당수 회합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책상머리에 앉아 틈틈이 보고 싶은 친구들 얼굴을 떠돌려 보았다.


내 고등학교 친구들은 의사가 유별나게 많다. 1980년대 잘 나가던 강남 8학군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덕도 있고 지금은 고인이 된 고등학교 3학년때 은사님의 영향도 매우 컸다.


서울사대를 졸업한 선생님은 당신이 의대에 진학하지 못했던 과거를 크게 후회하고 계셨다. 자연스레 선생님의 후회는 진학지도에 반영됐고 웬만큼 공부를 잘 하면 의사의 길을 강요받기에 이르렀다. 필자는 유일하게 스승의 뜻을 거스르고 내 인생을 찾아 진로를 바꾼 경우이나 한 반에 무려 6명이 의대에 진학하는 진기록이 수립됐다. 돌이켜보면 의대에 간 친구들은 한눈 안 팔고 오로지 공부에 매진한 모범생들이었다.


졸업 후 몇 년이 흐르고, 동창회 자리에서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났다. 더벅머리 고등학생의 티를 벗은 것은 여느 친구들과 비슷했으나 분명 의대생 동창들은 다른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사회에 대에 넓은 관심을 보이기보다는 의대 문화에 매몰된 느낌이었다. 대화의 상당부분이 교수와 선배, 전공 등 학교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또 술 한 잔 못할 것 같던 그 친구들은 하나같이 술고래가 돼 있었다. 의사 사회의 술 문화가 얼마나 거칠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거기에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라는 자부심에 가득한 친구들. 자연히 의대가 아닌 동창들과는 대화가 금세 끊겼다. 격하게 술잔이 돌아가다가 자기들끼리 싸움이 벌어지기 일쑤였고, 싸움의 발단도 다소 유치한 것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를테면 “어느 전공에는 어느 교수님이 최고다” 같은 의사 세계의 논제가 대부분이었다. 솔직히 당시에는 이런 예비의사들이 순수하다기보다는 답답하고 한심해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 이후 내가 의사들의 마음을 훔쳐 본 건 지난 1999년 의약분업-의료파업 사태 무렵이다. 사회부 기자로 서울대 의대에서 열린 의사 가운 반납 행사에 취재를 갔다. 약사법 개정에 반대하며 많은 의사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백의(白依)를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가운 반납식은 내가 본 어느 결의대회보다 비장하고 숙연했다.


젊은 의사뿐만 아니라 백발의 노의사들이 가운을 접어 반납하면서 굵은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밥그릇을 놓치지 않으려는 추한 모습이라는 비판이 쏟아졌으나 필자는 의사로서의 소명 의식에 충만한 친구들 얼굴을 떠올리며 그 장면,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해 천 여 명씩 쏟아져 나오는 법조인들, 오갈 때 없는 유학파 인재들. 의사도 예외가 아니다. 골목마다 들어서는 병·의원은 의사들의 빈익빈 부익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최근 필자가 만난 대형병원 원장은 대기업 CEO에 버금가는 경영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그에게 이미 한국 의료시장은 레드오션이고 중국과 저 멀리 중동, 세계인들이 이미 그의 환자요 고객이 돼 있었다. 그런가 하면 꿋꿋이 지역사회를 지키며 인술을 펴는 의사들도 적지 않다. 그들에게 어느 환자가 돈이 되고, 안되고의 문제는 딴 세상 이야기다. 그저 젊은 시절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했던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과 성을 다할 뿐이다.


최근 수험생을 둔 동료들과 자녀 진학 문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내 아들은 문과 전공이기 때문에 이공계의 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다. 의대 준비를 하는 자녀를 둔 동료는 의사로서 성공하기 쉽지 않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의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고 전했다. 확인되지 않았음을 전제로 “전국에 의대가 약 40개 있는데 우수한 학생들이 꼴찌인 00의대까지 다 채운 뒤에야 서울대 공대 지원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인재의 쏠림현상을 걱정하기에 앞서 개방과 무한경쟁에 맞닥뜨린 한국의 의료계에 희망이 보이는 것은 훌륭한 의사들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의사는 무얼 먹고 사는가? 인술을 베푼다는 사명감과 자존심, 최고 인재라는 자부심이 의사들을 세우는 힘이다. 계사년 새해엔 세상물정 모르는 착한 의사 동창들과 소주 한잔 나누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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