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들이 원하는 '따뜻한 의료진'
이제환 서울아산병원 혈액내과 교수
2012.03.13 15:52 댓글쓰기

▲이제환 서울아산병원   혈액내과 교수
(진료지원실 외래부장)
외래진료를 앞둔 오전 9시, 하루의 일과를 바삐 시작하는 많은 의료진과 이들을 만나기 위해 병원을 찾은 수많은 환자 및 보호자들로 병원 전체가 북적거린다. 개원한 지 어느덧 20여 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면서, 이러한 아침의 풍경은 이미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매일 아침 익숙하게 접하고 있는 지금의 서울아산병원의 모습을 1989년 개원 당시에는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새삼 들면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어낸 우리의 역량에 놀란다. 2010년부터 일 평균 1만 명을 넘기 시작한 외래환자는 2011년에 일 평균 10,500명이 되었고, 올해에는 11,000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병원 안팎으로 많은 변화가 생기고 있다.

 

외래환자 1만 명 시대. 외래에서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과 의사로서뿐만 아니라 외래부장이라는 병원 직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외래 환자수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가지게 된다. 진료에 앞서서 오늘 예약환자 목록을 보면 밀려오는 부담감으로 한숨부터 나오기 일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병원 전체의 신환수 제고를 위한 방안을 궁리하는 노력을 경주하기도 한다. 그러면 '외래환자 1만 명'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자칫 외래환자가 어느 순간 숫자로만 인식되면서 환자 한 명 한 명의 소중한 의미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다.

 

한 의료 전문가의 조사에 의하면, 외래 진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있어서 의료인과 환자 및 보호자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이 나타난다. 의료인들은 진료의 질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는 반면, 환자와 보호자들은 ▲예약의 편의성 ▲진료 대기시간 ▲친절에 대한 만족도 등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는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를 훼손하고 환자의 불만을 가져오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의사로서의 경험이 많아지고 나이가 들면서 점차 내가 주치의로서 내 환자와 보호자에게 위안을 주고 있는가를 점점 더 생각하게 된다(이는 아마도 환자와 보호자가 되어 본 경험을 몇 번 가지면서 들게 된 생각일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외래 진료 현장에서는 이러한 나의 마음을 현실로 옮기기 어려운 상황이 많이 벌어진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보면서, 특히 신환의 경우 환자의 문제점을 충분히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이에 따라 환자에게 일어난 객관적이고 의학적인 사실들, 예를 들면 검사결과지, 진료의뢰서, 진료기록지 등을 위주로 환자를 보게 되며 실제 환자나 보호자의 주관적인 얘기들은 무시하거나 간과하기 쉽다. 그리고 나서는 의학적으로 확실한 이야기만 통보하듯이 이야기하고서 그 환자의 진료를 마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내가 의사로서 환자나 보호자에게 위안을 주기는커녕 도리어 근심을 안겨주고 상처만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만약 환자수라는 것이 그저 내가 오늘 해결해야 할 환자들의 수라면, 이러한 한 명 한 명의 환자가 모여서 일 평균 1만 명이 된다면, 이는 참으로 서글픈 일이며 1만 명이라는 것이 자긍심이 되기 보다는 부끄러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나를 포함한 서울아산병원의 대다수 진료 교수들은 환자 한 명 한 명의 소중함을 잘 알고 그들을 따뜻하게 보듬고 진료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어려운 여건 속에서 모두 완벽하진 못하겠지만….

 

며칠 전의 일이다. 오전 외래를 보기 위하여 진료실에 들어갔는데 책상 위에 리본형태로 접힌 편지가 놓여있었다. 'To. 이제환 교수님'으로 시작하는 짧은 글이었는데, 나에게 오랫동안 치료를 받다가 더 이상 항암치료가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나빠져서 지방의 집 근처 병원으로 옮겼던 백혈병 환자의 따님이 남긴 글이었다. 그 환자분은 병원을 옮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단다. 이후에 따님이 외래로 나를 찾아왔었는데 마침 내 외래가 없는 날이어서 그냥 쪽지만 남기고 간다며,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 왔다 간다고 했다. 환자분이 항암제 치료로 힘들 때 등을 쓸어내려 주면서 용기를 준 것이 제일 고맙다고 했다. 무심코 했던 나의 작은 행동이 환자와 보호자에게는 큰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내가 정말 최선을 다해 진료하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위로를 주었는가를 스스로 반문하면서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나의 마음을 알아봐주고 이해해 주는 보호자의 글에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았다.

 

의사들은 흔히 진료의 질을 높게 유지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환자와 보호자들은 의사들에게서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어한다(아마도 우리 병원을 방문한 환자들은 높은 진료의 질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한 명 한 명의 환자들을 소중히 여기고 질적으로 높은 의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환자의 마음까지도 위로해 줄 수 있다면 서울아산병원은 한층 더 존경 받는 병원이 될 것이다. 우리가 개원 초에 2012년 현재의 외래 환경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처럼 5년 후, 10년 후의 우리 병원의 외래 환경도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것은 병원 안팎의 여러 요인들로 인해 매우 큰 변화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처럼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을 요구하는 환경 속에서 환자와 의료진 사이의 깊은 신뢰와 존중, 배려의 관계는 그 무엇보다도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외래를 보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는다. 지금 내 앞에서 진료를 받기 위해 앉아있는 한 명의 환자가 그 날 우리 병원 외래를 찾은 1만 명의 환자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에게는 한 명뿐인 소중한 환자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고 환자의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는 의사가 되겠다고. 이를 위하여 우선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를 활짝 웃는 얼굴로 맞이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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