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잘 마시는 법
2011.10.25 02:52 댓글쓰기
어차피 취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와인은 술 중에 격조 높은 술로 인식돼 있다. 와인의 본고장 프랑스에서 4년 동안 보고 들었던 경험을 되짚어 몇 가지 와인 즐기는 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다만 제안하는 내용들은 철저히 경험칙에서 나온 것이며 과학성이 없을 수도 있다는 점을 먼저 밝힌다.
프랑스에 파견나간 애주가들은 대부분 한 두 차례 열병을 치른다. 뒤 끝이 고약한 과실주 와인의 무서움을 모르고 향기와 분위기에 취해 한국식으로 벌컥벌컥 들이켜다 보면 다음날 아침은 그야말로 죽음이다. 천근만근 무겁고 깨질 것 같은 머리를 가까스로 일으켜 출근하면서 “다시는 와인을 마시지 않으리”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그러나 두통이 가시고 하루 이틀만 지나면 향긋한 와인의 유혹에 빠져 집근처 브라서리(brasserie)로 향하게 되는 게 초보 파리지앵의 보편적인 행태다.
일부 상류층을 제외하고 프랑스인들은 와인을 즐기는데 그다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다. 좋은 와인 자체를 찾기보다는 음식에 잘 맞는 와인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들이 즐기는 프랑스 요리와 어떤 와인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전문 서적을 참고하시라.
현실적으로 한식을 주로 먹는 우리들에게 어떤 와인이 좋을까 하는 점에 대해 유심히 살펴보았다. ‘코트 뒤 론(Cotes-du-Rhone)’이 대세였다.
파리로 이주한 지 20년이 훌쩍 넘은 교포들, 한식을 주식으로 하며 와인을 즐기는 사람들이 ‘코트 뒤 론’을 적극 추천했다. 실제로 내가 마셔 봐도 한식과의 궁합이 기가 막혔다. ‘코트 뒤 론’은 프랑스 남부 론 지방의 와인이다. 지도를 보면 론 지방은 부르고뉴와 보르도, 지중해의 중간 지대에 위치한다. 그만큼 프랑스 와인의 특장점을 골고루 갖고 있다.
타닌 성분이 강해 무겁게 느껴지는 보르도 와인보다 한결 부드러우며 부르고뉴 와인의 꽃향기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지중해 와인과 같이 당도가 지나치게 높지도 않아 담백하다. 게다가 품질에 비해 가격이 저렴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술이 체질적으로 약한 사람은 와인에 물이나 얼음을 타서 드셔 보시라. 소주, 위스키에 물을 타서 마시는 이른바 일본식 미주와리와 비슷하다. 품격을 따지는 사람에게는 귀한 와인에 물을 타다니, 실로 야만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파리의 뒷골목에서 흰머리 풀풀 난 노인네들이 독한 알코올을 감당하기 힘들어 와인에 물을 타서 마시는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따라해 보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꼭 와인을 적정한 온도와 농도에 맞춰 마셔야 한다는 것은 지나친 형식주의에 불과하다.
파리 서쪽으로 40킬로미터 쯤 나가면 나시오날(National)이라는 명문 골프장이 있다. 매년 EPGA의 주요 대회인 프랑스 오픈이 열리는 곳이다. 이 골프장 클럽하우스에서는 중부 르와르 지방 소뮤르(Saumur)의 샹피니(Champigny)라는 상큼하고 부드러운 와인을 팔고 있다.
더운 여름 라운딩을 마치고 클럽하우스에 돌아와 시원한 맥주 한잔 마시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즐거움이지만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는 늘 그렇듯이 와인이 빠지지 않는다. 상큼한 샹피니를 차게 냉장 보관했다가 개봉해 한 모금 넘기는 맛은 맥주와는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더우면 와인에도 과감하게 얼음을 타서 마셔보라. 뜻밖의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복잡한 레드 와인 선택에 자신이 없으면 화이트 와인을 추천한다. 깊이 들어가면 화이트 와인도 종류와 선택의 폭이 무궁무진하지만 비교적 쉽게 골라 마시는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부르고뉴의 대표적인 화이트 와인인 샤르도네(Chardonnay)와 쇼비뇽 블랑으로 만든 상세르(Sancerre), 알자스 지방의 리즐링(Riesling)등은 파리 생활의 마지막 1년 동안 내 혀를 즐겁게 했던 화이트 와인이다.
와인 초보자인 필자도 그 특유의 향과 맛을 구별해가며 각각의 와인을 즐길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화이트 와인은 해산물 뿐 아니라 한식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음식에 두루 잘 어울린다는 장점이 있다. 또 마그네슘과 칼슘이 풍부해 골다공증 등 노인성 질환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고 해 프랑스 실버 계층의 사랑을 받고 있다.
파리 최고의 한식당은 부자들이 많이 사는 16구에 자리한 우정식당을 꼽는다. 한국의 명사들이 파리를 방문하면 한번 쯤 들리는 곳이고 한식을 좋아하는 프랑스인 단골손님들도 많다. 우정 사장 조성환씨는 한인 가운데 손꼽히는 와인 전문가다.
그 분과 교분을 쌓으면서 화이트 와인의 참맛을 배우게 되었다. 조사장 덕분에 많은 와인 딜러들이 모이는 와인 품평회에 참여할 수 있었고 파리 유명 레스토랑의 사장, 주방장들이 모이는 와인 파티에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품평회에서는 와인 생산자들이 저마다 자기 밭에서 기른 포도로 정성스레 만든 와인을 직접 가져와 선보인다.
나는 그들이 소개하는 모든 와인이 너무나 훌륭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경지가 높이 오른 분들에게는 와인이 ‘마음의 술’이었다. 왠만한 와인을 모두 섭렵했다는 우정 조사장은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인 부르고뉴와 보르도 와인 중에 부르고뉴 와인을 더 높이 평가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보르도는 지나치게 상업화돼 인간미가 없다는 것. 큰 바이어에게는 헬기까지 제공하며 공을 들이면서도 소규모 상인에게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 보르도 사람들이 야박하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자기 포도밭에 대해 우직한 자부심을 갖고, 단골 고객을 친구처럼 여기는 부르고뉴를 조사장은 더 좋아했다. 와인 맛도 부르고뉴가 낫다고 칭찬했다.
내가 보기에 마음이 가는 곳이 술도 더 맛있는 법. 조사장은 부르고뉴 사람들의 고집과 인간다움에서 훌륭한 와인 맛을 찾은 듯 했다. 가격과 빈티지로 와인을 재단하지 말고 자신만의 작은 추억이 담긴 와인을 많이 만들어 보는 것도 와인을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실제로 많은 프랑스인들이 아들을 낳고 딸을 낳은 해의 와인을 많이 구입해 지하 꺄브(cave)에 보관한다. 자녀들이 성장해 결혼을 할 때 자녀의 나이와 같은 와인을 친지, 친구들과 나누며 의미를 되새긴다. 추억이 될 만한 자리에서 당시에 음미했던 와인을 기억하고 훗날 다시 찾아보는 재미도 와인이 주는 또 하나의 재미요 선물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괜찮은 와인 찾는 법을 살펴보자. 와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다면 레스토랑에서는 하우스 와인을 시켜보자. 값이 싸고 메뉴판에 없다는 점 때문에 체면을 구긴다는 생각은 오산이다. 프랑스 전국을 여행하면서 도시와 시골 마을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하우스 와인은 대부분 깊은 인상을 주었다.
자존심 강한 식당 주인들은 절대로 허접한 와인을 하우스 와인으로 내놓지 않는다. 가격대비 맛과 향이 우수한 와인을 자기 식당의 얼굴로 소개한다. 주인장의 취향과 배려가 담긴 술을 비교하며 경험해 보는 것도 무척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하우스 와인이라는 개념이 아직 확고하게 정립돼 있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최근 서울 청담동 등지의 몇몇 유명 와인 레스토랑에서는 프랑스식으로 하우스 와인에 공을 들이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초보자가 대형 마트에 와인을 사러 갔다면 병에 붙은 딱지를 눈여겨보자. 와인 생산국에서는 매년 수많은 와인 경연대회가 열린다. 규모야 천차만별이지만 이런 대회에서 입상한 와인들은 어느 정도 품질이 보장된 것들이 많다.
메다이 도(medaille d'or 금메달), 메다이 다르정(medaille d'argent 은메달)등으로 구분되는 경우가 많고 딱지가 와인 병목이나 아래 부분에 붙어 있다. 얼마 전 마트에 갔더니 이런 류의 와인들도 수입되고 있었다. 자신이 없을 때는 금·은메달 딱지 붙은 놈으로 고르면 실패할 확률이 낮아진다.
한 가지 더, 소비자가 일일이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서민들이 접하는 보통 와인은 빈티지나 품종보다 보관 상태에 따라 와인 맛이 좌우되는 것을 많이 보았다. 지난해 내가 귀국하면서 이삿짐 사이에 끼워 넣어 들고 온 와인 몇 십 병의 운명이 지금은 크게 달라져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운 좋게 서늘한 김치 냉장고를 차지한 놈들은 아직까지 제 맛을 뽐내고 있고, 자리가 없어 다용도실에 처박힌 놈은 여름을 지나면서 향기를 잃었다.
어느 유명 요리사는 와인 세계에도 교조주의가 판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형식과 체면에 얽매여 부담 없이 와인 즐길 기회를 잃어버리고 심지어 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까지 있다니 한심한 노릇이다. 와인은 마음으로 마시는 술이다. 편하게 즐기자. 오늘 저녁 김치 두루치기에 ‘코트 뒤 론’ 한 병 곁들이는 건 어떨까?


조 정 SBS 보도국 차장(전 파리특파원)
조 정 SBS 보도국 차장(전 파리특파원) 기자 (webmaster@dailymedi.com)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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