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비밀로 해주세요!'
2009.12.06 23:41 댓글쓰기
환자를 진료하는 중에 보호자에게서 심심치 않게 듣는 요구사항 중에 하나다. 환자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고령의 암환자의 보호자에게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

일단 의사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병명과 치료과정 그리고 예후를 명확하게 설명해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환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를 괴롭히는 병의 정확한 진단과 앞으로의 치료 방법에 대해 알고 있지 않다면 의사의 진료행위에 대해 믿음이 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치료과정에 동참하기가 힘들어 질 것이다. 의학적으로도 충분히 설명을 듣는 것과 병에 대한 환자의 이해가 높을수록 치료의 참여도와 효과가 높아진다는 연구결과도 많이 있다. 그렇다면 왜 보호자는 환자에게 병에 대한 사실을 비밀로 해달라는 것인가.

여든을 바로 보는 위암 환자가 있다.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이고, 정신상태도 여느 젊은이 못지 않다. 앞으로의 치료과정과 예후를 설명하려는데 갑자기 걱정스런 표정으로 아들이 나를 가로 막는다. 그리고 부모님을 진료실 밖으로 내보고 나에게 부탁을 한다. 제발 부모님에게는 병명을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다. 부모님을 잘 아는데 자신의 병이 암이라는 사실을 알면 충격이 너무 커서 치료를 제대로 받으실 수 없다는 것이다.

환자가 다시 진료실에 들어온다. 환자의 병명이 위암에서 갑자기 궤양으로 바뀌고 수술명도 모호하게 간단한 위 수술이라고 설명한다. 환자가 입원하고 수술 받고 퇴원한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암이라는 질환은 이런 과정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치료의 시작일 뿐이다. 최종 병기에 따라 추가적인 항암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고, 정기적인 추적검사를 거의 수년간은 해야 한다.

결국 항암치료가 필요한 상황에 되어서야 보화자의 동의 하에 환자에게 암이라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말해 주었다.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환자는 자신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차분히 받아 들인다. 그리고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오히려 뒤에서 쉬쉬하는 자식들을 더 걱정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비밀은 없고,우리들의 오버액션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 보호자와 의사는 속이 후련하다. 더 이상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이제 확실하게 치료과정과 예후를 설명할 수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미리 환자에게 말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한다.

넓은 견해로 본다면 비밀이 많은 사회는 바람직 하지 못하다. 좋은 사실이든 나쁜 사실이든 간에 정보를 정직하게 공개하는 사회야 말로 바람직한 사회일 것이다. 정보의 공개와 경쟁의 투명성이야 말로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핵심요소다. 환자의 비밀이야기를 하다가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 진 것 같다.

환자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그 누가 모르겠는가? 하지만 환자 자신도 기본적으로알 권리가 있는 인간이지 않을까? 환자를 생각한다면서 결국 병을 부정하고 싶은 보호자들의 마음을 만족시키기 위해 환자에게 비밀로 하자는 것이 아닌가? 숨겨진 진실을 결국 숨겨질 뿐 진실이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내 몸에 대한 사실을 재대로 알지 못하고서 힘든 치료과정을 겪는 고초를 생각해 본다면 보호자의 걱정이 너무 앞서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치료과정의 고통과 기쁨 그리고 삶과 죽음의 당사자는 결국 환자 자신이다. 그리고 병을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 알려야 할 사실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면 그 어떤 이유에서도 우리는 고지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김정구 대전성모병원 외과 교수 기자 기자의 다른기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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