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 위기 산부인과, 천신만고 끝 '심폐소생'
박중신 대한산부인과학회 이사장
2023.11.13 05:49 댓글쓰기

‘시원섭섭’이라는 통상적 이임사는 어울리지 않았다. 75년 역사상 최대 위기 상황에 중책을 맡았던 만큼 사력을 다했다. 단일 진료과목 존망(存亡)이 아닌 국가 명운(命運)이 걸린 문제라는 위기감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저출산, 저수가, 저충원의 3저(低) 악재가 되풀이 되는 작금의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불철주야로 뛰었다. 절박함은 위정자들을 움직였고, 단단했던 매듭을 하나 둘 풀어낼 수 있었다. 정부가 분만 수가 개선을 위해 연간 3000억원을 투입하기로 했고, 불가항력적 분만사고 책임을 완화하기 위한 별도 협의체가 꾸려졌다. 오늘(11일)을 끝으로 2년 임기를 마치는 대한산부인과학회 박중신 이사장은 “한숨 돌리기는 했지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국내 산부인과 위기 극복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않았다.


“3000억 예산 투입, 분만환경 개선 마중물”


박중신 이사장이 취임 당시 △분만수가 획기적 개선 △의료사고 법적 책임 완화 △학술활동 강화 △국제 교류 활성화 등 4가지 지향점을 설정했다.


그 중에서도 분만수가 개선은 가장 시급한 문제였다. 분만현장 의료진이 합당한 보상을 받는 진료환경을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2022년 대통령 선거 당시 위기에 처한 분만수가를 포함해 산부인과를 살리기 위해 필요한 정책을 정리해 여야 대선후보들에게 전달했다.


새정부 출범 이후에는 정관계 인사들과 수시로 교류하며 분만수가 인상 및 인프라 확충 필요성을 알리고 설득을 이어왔다.


그 결과 정부는 3000억원을 투입해 분만수가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로 했다. 상대가치점수 조정이라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재정 순증’을 통한 과감한 투자라는 점에서 의미를 더했다.


세부적으로는 산부인과 전문의가 상근하고 분만실을 보유한 의료기관에 대해 ‘분만 안전 정책수가’ 명목으로 건당 55만원을 추가 지급한다.


지역에 따라 분만 수가가 55만~110만원 인상되는 셈이다. 여기에 고령산모, 고위험 분만에 대한 가산수가가 현행 30%에서 최대 200%로 확대되고, 응급분만 정책수가도 별도 지원된다.


박중신 이사장은 “산부인과는 그동안 저출산, 저수가 속에 분만 인프라 붕괴와 전공의 지원 감소로 신음했다”며 “이번 결정은 이러한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려운 환경에서도 분만을 수행하고 있는 의료기관에 대한 지원 강화는 인산부와 태아, 신생아를 위해 단비와 같은 조치”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다만 그는 분만수가와 더불어 분만실 운영비 지원도 이뤄져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박중신 이사장은 “저출산을 감안하면 분만건수는 계속 감소할 것”이라며 “분만이 없는 날에도 분만실 운영을 위해 의료인력, 의료장비 등에 대한 운영비를 지원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이어 “분만수가 인상은 장기적으로는 그 효과가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일선 병원들이 분만실 운영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지원 대책을 고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료분쟁 개선 방안 등 젊은의사 기피현상 조금이나마 해소 기대”


박 이사장은 분만수가와 함께 분만사고에 대한 법적 책임 완화였다. 불가항력적 의료사고를 인정하지 않는 재판부 판결이 분만 인프라 붕괴를 야기하고 있다는 우려였다.


그는 “의료인이 적절한 조치를 취해도 결과가 나쁘다는 이유로 거액의 배상 책임을 묻는 게 작금의 현실”이라며 “젊은의사들이 산부인과를 기피하는 주된 원인”이라고 토로했다.


실제 대한산부인과학회에 따르면 신규 산부인과 전문의는 2004년 259명에서 2023년 102명으로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특히 남자 산부인과 전문의는 171명에서 7명으로 전체 6.7%에 불과하다. 남자 산부인과 전문의가 사라지면서 분만 취약지, 군의관 및 공중보건의사 수급에도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분만을 담당하는 산과 인원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전국 95개 수련병원에서 산과 교수는 125명(전임교원 기준)으로 병원당 1.3명에 불과하다.


또 교수 평균 연령이 5세 높아지면서 산과 교수 고령화도 지속적으로 악화해 2032년에는 교수 인원이 현재 76% 수준으로 급감할 전망이다.


더욱 암담한 상황은 젊은의사들 기피현상 심화다. 강동경희대병원 산부인과 설현주 교수가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는 의료소송이 분만 기피현상에 미치는 영향을 방증한다.


조사에 따르면 4년차 전공의 및 전임의 향후 진로에 대한 물음에 응답자 47%가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분만을 하지 않겠다고 답한 이유에 대해서는 '의료사고 우려 및 발생에 대한 걱정'이 79%로 가장 높았다.


향후 분만을 하겠다고 응답한 경우에도 75%가 '분만관련 의료사고 우려 및 발생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박중신 이사장은 백방으로 이러한 문제점 알리기에 나섰다. 국회 토론회를 마련해 공론화를 도모하는 한편 입법부와 행정부 문턱이 닳도록 제도 개선을 요청했다.


그 결과, 지난 5월 불가항력적 의료사고 피해자를 위한 보상재원을 정부가 100% 마련하는 내용을 담은 ‘의료사고 피해구제 및 의료분쟁 조정 등에 관한 법률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아울러 최근에는 의료사고 부담 완화를 위해 보건복지부와 법무부를 중심으로 ‘의료분쟁 제도개선 협의체’를 구성·운영하기로 했다.


박중신 이사장은 “국회와 정부가 분만사고에 대한 의료진 책임 완화 논의에 나선 것은 고무적”이라며 “협의체에서 보다 실효성 있는 대책이 도출되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75년 산부인과학회 역사, 글로벌 위상 강화 총력”


4가지 과제 중 나머지 2개도 굵직한 성과를 거뒀다. 학술단체 위상의 바로미터인 학회지 권위를 높였고, 국제 교류에도 주목할 만한 결과를 얻었다.


우선 대한산부인과학회가 발간하는 학술지 ‘Obstetrics & Gynecology Science’가 'ESCI'(Emerging Sources Citation Index)에 등재됐다.


ESCI는 글로벌 학술정보분석 서비스 기업인 클래리베이트(Clarivate)에서 만든 데이터베이스로, 세계적 권위를 갖고 있는 SCIE 등재 전, 후보군 성격을 갖는 것으로 간주된다.


아울러 15년 전 학회 사무총장으로서 60년사 발간을 주도했던 박중신 이사장은 올해 대한산부인과학회 75년사도 추진, 올해 중으로 발간될 예정이다.


후학들에게 국내 산부인과학 역사를 바로 알리고, 자긍심을 심어 줌으로써 필수의료 한 축인 산부인과 중흥을 다시금 도모하기 위한 행보였다.


국제적인 교류를 통한 대한산부인과학회의 글로벌 위상 강화에도 힘썼다.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지난 2021년 세계산부인과연맹(The International Federation of Gynecology and Obstetrics, 이하 FIGO) 상임이사국에 당선됐다.


FIGO는 1954년에 설립돼 전 세계 130여 회원국이 가입한 산부인과학 분야 최대 학술단체로, FIGO 회무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집행위원회에서 상임이사국을 선출한다.


박중신 이사장은 “FIGO 상임이사국 선출을 통해 대한민국 산부인과학 위상을 제고하고, 세계 의학 발전에 공헌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아울러 대한산부인과학회는 오는 2024년 부산 벡스코에서 아시아태평양 산부인과학회 학술대회(AOFOG 2024)를 개최한다.


이 외에도 분만이나 시술, 수술 등 각종 의료사고 분쟁에 대비해 산과 관련 동의서 표준안은 을 마련해 분만 의료기관들의 송사 리스크를 줄이고자 했다.


또한 예방접종 진료 권고안 및 무증상 신생아 대상 선별 유전자 검사에 대한 진료 권고안을 통해 진료현장의 애로를 덜어주는 등 임기 마지막까지 회원을 위해 진력했다.


박중신 이사장은 “2년의 임기는 영광된 시간이었다”며 “후배들과 후학들은 위기와 절망이 아닌 보람과 희망으로 점철된 진료환경이 조성되길 간절히 바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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