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척박한 의료환경 극복 '경영에 덕(德)' 더하겠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1위’,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감’, ‘모든 직원이 하나로 똘똘 뭉치는 조직’. 하나이비인후과병원은 지난 1995년 ‘하나’라는 이름에 이 세 가지 기치를 담아 출발했다. 그로부터 30년이 흐른 지금. 출범 당시 지향했던 가치를 실현하고, 이제 또 다른 웅비(雄飛)를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누적환자 300만명, 수술건수 7만건은 당당히 국내 이비인후과 최정점에 있음을 방증한다. 이제 국내를 넘어 세계적인 이비인후과 전문병원으로 거듭나는 중이다. 이상덕 병원장은 지난 30년 세월을 ‘행복’과 ‘보람’이라는 표현으로 반추했다. 아울러 앞으로 펼쳐질 30년 세월 역시 이 두 단어로 점철되길 소망했다. 물론 그 기저에는 지금껏 그래왔듯 ‘하나’에 담긴 세 가지 기치가 자리할 것이라는 부연 설명도 곁들였다. [편집자주]
투병의 고통이 키운 의사 꿈
이상덕 병원장은 고교시절 투병의 아픔 속에서 의사 꿈을 키웠다. 고3 때 큰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수업을 거의 듣지 못했고, 결국 입시 목전에서 휴학을 택해야 했다.
건강이 채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듬해 복학 후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진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 의사면허를 취득한 그는 강북삼성병원에서 수련을 시작했고, 그 곳에서 인생의 스승인 박재훈 원장을 만났다.
박재훈 원장은 국내 최초로 코골이 수술, 축농증 내시경 수술, 알레르기 비염 레이저 수술을 시행한 이비인후과 권위자였다.
특히 해외학회에서 체득한 경험과 지식을 제자들한테 전수해 주는 것은 물론 제자들이 술기를 배우기 위한 해외연수도 적극 장려했다.
어느 날은 박재훈 원장이 스페인에서 열린 국제학회에서 축농증 내시경 수술 창시자인 오스트리아 그라치에 스탠버거 교수를 만나고 와서 국내 도입을 천명했다.
수시로 해외를 오가며 술기를 익히고 결국 국내에 축농증 내시경 수술을 도입했다. 당시 이상덕 원장은 레지던트 1년차였다.

애제자였던 이상덕 원장은 박재훈 원장 수술발에 붙박이 어시스트로 참여하며 자연스레 어깨너머로 내시경 수술을 배웠고, 스승과 함께 내시경 수술 대중화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
“열정이 충만하던 레지던트 2년차 시절 오스트리아에 진행되는 카데바 해부 실습 교육을 받어하는 제자를 위해 호기롭게 병원장과 맞서던 스승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최상의 호흡을 자랑하던 사제(師弟)였지만 워낙 명성이 높은 박재훈 원장이 당시 개원한 모 대학병원 초대 이비인후과 과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이별 아닌 이별을 해야했다.
공허함을 느낀 이상덕 원장은 천착을 거듭한 끝에 박재훈 원장을 찾아가 개원을 제안했다. 스승의 명성과 자신의 패기를 합하면 엄청난 시너지가 발휘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스승은 제자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고, 1994년 준비를 시작해 1995년 하나이비인후과를 개원했다.
‘하나이비인후과’라는 병원 이름에는 ‘둘이 뭉쳐 하나되자’라는 결의가 담겼다. 아울러 ‘1등’, ‘유일’, ‘원스톱 진료’라는 의미도 투영했다.

환자를 위한 하나의 발상 전환
이상덕 원장은 기존의 ‘의사 중심’이던 진료 패러다임을 철저히 ‘환자 중심’으로 전환코자 했다. 그렇게 탄생한 게 원스톱 진료서비스였다.
환자들이 진료와 검사, 진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한 번에 끝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수 차례 내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사라졌다.
그는 또한 당시 이비인후과 최초로 ‘전문 크리닉’ 개념을 도입했다. 이비인후과 중에서도 ‘코’만을 전문으로 하는 클리닉을 국내에서 최초로 시도했다.
발상 전환의 백미(白眉)는 ‘모니터 시스템’이었다. 환자들이 의자에 앉아 자신의 콧속을 모니터로 보면서 의사가 설명해 주는 시스템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상덕 원장은 “모니터 시스템을 통해 충분히 설명한 후에 환자가 납득하면 치료를 시작하니 만족도가 정말 높았다”며 “이런게 진정 환자 중심 의료였다”라고 술회했다.
환자 중심 의료가 큰 반향을 일으키며 연착륙에 성공은 했지만 환자들의 만족도 제고를 향한 목마름은 여전했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최신 진단과 치료 기술을 개발하고 거기에 걸맞는 시스템을 갖춘 ‘전문병원’이라는 해답을 찾았다.
하나이비인후과가 지향하는 ‘환자 중심 의료’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은 ‘전문병원’이라는 판단이 섰고, 그 결심은 국내 전문병원 제도의 시발점이 됐다.
실제 이상덕 원장은 전문병원 시범사업부터 정부와 호흡하며 제도 정착에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얼마 전까지 대한전문병원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아울러 일찍이 의료기관평가인증을 통해 의료의 질과 시스템, 시설에 이르기까지 환자들이 안심하고 찾을 수 있는 병원임을 인정 받았다.
장비에 대한 투자도 아낌이 없었다. ‘모든 첨단장비는 가장 먼저 도입한다’는 당찬 결심 덕분에 하나이비인후과는 네비게이션 수술, 풍선 확장술 등을 가장 시행할 수 있었다.
세계적인 의료장비 회사가 ‘아시아 지역 트레이닝 센터’로 지정할 정도로 하나이비인후과의 첨단장비와 최신 술기 도입에 대한 열정은 독보적이다.
이렇다 보니 각종 평가에서 의료의 질과 환자 만족도는 늘 상위권이다. 특히 서비스 척도인 환자경험평가 점수는 대학병원을 능가한다.

공유의 가치, 이비인후과 발전 기여
진료, 장비, 서비스 3박자가 조화를 이루면서 하나이비인후과는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했다.
개원 10년 만에 축농증 수술 실적이 전국 1위를 차지했다. 빅5 병원들보다 많은 수술을 했다는 사실은 이상덕 원장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원장은 그 자신감을 기반으로 2007년 의원에서 병원으로 전환했다. 진료 영역 역시 코는 물론 귀와 목까지 보강했다. 그 결과 환자와 수술건수가 수직 곡선을 그렸다.
박재훈 원장은 국내 이비인후과 발전과 환자를 위해서라도 이러한 성공 노하우를 다른 의사들에게 공유해야 한다고 했고, 그 일환으로 1998년 개원의 대상 첫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하나 비과 임상 집단회’라는 이름으로 개원의 50명을 초청한 첫 심포지엄은 과히 폭발적이었어. 개원의들이 갈망했던 정보가 즐비했던 만큼 행사 이후로도 문의가 쏟아졌다.
이듬해에는 무려 700명의 인파가 운집했다. 전국 개원의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자연스레 대한이비인후과의사회 태동의 발판이 마련됐다.
당시는 이비인후과 개원가 교류의 장(場)이 전무했던 만큼 하나이비인후과 심포지엄은 개원의사단체 발족의 구심점으로 작용했다.

이상덕 원장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다 실질적인 술기 공유를 위해 카데바 실습을 준비했다. ‘하나 부비동 해부 실습 워크숍’은 코로나19 전까지 장장 15년 동안 이어졌다.
이 워크숍에는 내로라하는 대학병원 교수들이 자청해서 강사로 나섰고, 개원의부터 전공의에 이르기까지 이비인후과 의사들의 열린 술기교육의 장으로 거듭났다.
그는 “개원의 대상 심포지엄은 물론 카데바 실습 교육은 정말 보람됐다”며 “스승님의 말씀대로 공유의 가치를 제대로 발현시킬 수 있었던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특히 카데바 실습은 자연스레 교수와 개원의가 호흡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했고 이후 학회와 의사회의 유기적 호흡으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혼자 하면 빨리 가고, 함께 하면 멀리 간다
호사다마(好事多魔)였을까. 하나이비인후과가 소위 잘 나가면서 불편한 상황들도 연출됐다. 개원 10년쯤 되던 시점에 ‘하나이비인후과’ 명칭을 무단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급격히 늘었다.
이미 상표권 등록을 마친 상태였던 만큼 명백한 불법이었지만 이상덕 원장은 제재를 가하기 보다 제도권으로의 편입을 결심했다.
하나이비인후과를 지향한다면 그에 걸맞는 시스템을 갖추도록 도움으로써 보다 많은 환자들이 상질의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의미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지난 2005년 하나이비인후과 네트워크가 설립됐고, 현재 서울, 경기, 부산, 대전, 울산 등 전국에 43개 병원이 소속돼 있다.
하나이비인후과 네트워크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기준을 통과해야 하고, 가입된 후에도 매년 워크숍 등을 통해 정도관리를 받아야 한다.
하나이비인후과가 실천해 온 ‘공유의 미학’은 병원 운영방식에도 오롯이 투영돼 있다.
이상덕 원장은 일찍이 병원을 파트너십 체제로 전환했다. 개설자 입장에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만 ‘함께 만들어 가는 병원’이라는 설립 취지를 고수할 유일한 방법이었다.
때문에 하나이비인후과병원의 중요 사안들은 4명의 운영위원들이 매달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운영위원회에서 부결되면 어떤 일이든 추진이 불가한 구조다.
이 원장은 “지난 30년 동안 나름 잘해왔다고 자신하지만 앞으로 30년 잘하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세대 파트너들을 양성하고 그들에게 좋은 시스템을 물려줌으로써 하나이비인후과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언제나 최상의 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바람이다.
그래서 그는 의사를 채용하면서 ‘주인의식을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주인의식이 있는 사람은 추후 조직의 주인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발전하기 어렵다는 게 지론이다.
아울러 ‘환자를 가족같이 생각해 달라’, ‘무리하게 수술하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는다. 오늘의 하나이비인후과를 있게 해 준 ‘환자 중심 의료’라는 흔들림 없는 그 진료철학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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