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머릿속 시한폭탄'으로 불리는 뇌동맥류 치료 패러다임이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과거 두개골을 여는 개두술은 신경외과, 카테터를 이용한 혈관 내 시술은 영상의학과 영역으로 구분됐다. 하지만 기구 발달과 술기 진화로 의사 한 명이 두 영역을 모두 집도하는 하이브리드 치료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전 세계적으로 혈관 내 치료 비중이 급증하고 있지만 복합 뇌동맥류 등 고난도 영역에서는 여전히 개두술 역할이 필수적이다. 데일리메디는 미국 스탠퍼드대 연수를 마치고 돌아와 하이브리드 뇌혈관 치료를 선도하고 있는 서울성모병원 신경외과 최재호 교수를 만나 임상적 강점과 치료 기준, 국내 뇌혈관 치료 현주소를 들어봤다. [편집자주]
국내 뇌혈관 질환 치료의 75% 이상이 혈관 내 시술로 이뤄지는 시대다. 미국은 그 비중이 90%에 육박한다.
1996년 국내에 코일 기구가 도입되고, 2000년대 초반 대규모 임상 연구(ISAT)를 통해 파열성 뇌동맥류에서 코일 색전술의 우수한 성적이 입증되면서 치료 트렌드가 급격히 이동했다.
사타구니 혈관을 통해 얇은 관만 넣으면 돼 두개골을 여는 것에 대한 환자의 공포감이 적고, 집도의 입장에서도 개두술보다 수술시간과 습득 기간이 짧다는 점이 작용했다.
하지만 최재호 교수는 “혈관 내 치료가 대세로 자리 잡았음에도 수술적 치료는 결코 없어져서는 안 될 중요한 치료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하이브리드 치료는 개두술과 혈관 내 시술을 모두 활용하는 방식”이라며 “두 치료의 장단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적재적소에 적용하는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치료법 결정 기준은 환자안전…하이브리드 ‘강점’
그가 치료법을 결정할 때 가장 최우선으로 두는 기준은 환자안전이다. 환자가 병원에 왔을 때보다 상태가 나빠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완치에 가까운 결과를 내는 게 목표다.
두 가지 치료법을 모두 다룰 수 있으면 특정 시술에 치우치지 않고 환자에게 가장 안전하고 유리한 맞춤형 방법을 객관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
임상적으로 두 치료법을 가르는 기준은 동맥류의 해부학적 구조와 환자 상태다. 동맥류 위치와 모양, 입구인 경부 넓이, 주변 혈관과의 유착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살핀다.
고령이거나 기저질환이 많다면 혈관 내 시술을 우선 고려하지만, 젊은 환자이거나 중대뇌동맥 및 전맥락총동맥에 발생한 동맥류는 장기적인 완치를 위해 개두술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이브리드 의사의 진가는 난도가 높은 복합 뇌동맥류 치료에서 더욱 발휘된다.
경부가 넓은 광경 동맥류는 최근 혈류 교란 장치(Flow Disruptor) 등이 도입돼 시술이 용이해졌지만, 여전히 개두술을 통해 클립으로 혈관 모양을 재건하는 게 더 나은 결과를 보이기도 한다.
혈류 변환 스텐트(Flow Diverter)로도 해결되지 않는 뇌 중심부의 구불구불한 거대 동맥류 역시 복잡한 혈관 문합술 등 외과적 수술이 반드시 뒷받침 돼야 한다.
문제는 개두술이 꼭 필요한 상황임에도 머리를 연다는 두려움 때문에 시술만을 고집하는 환자들이다.
최재호 교수는 환자들의 공포감을 줄이기 위해 최소 침습 수술을 적극 활용 중이다. 수술 전 삭발을 하지 않고 눈썹 부위를 4cm 가량 절개하거나 관자놀이 부위를 5cm 정도 작게 여는 방식이다.
그는 “수술이 더 도움 되는 환자들의 공포감을 덜어줄 수 있을지 고민한 결과”라며 “혈관 내 치료 발전에 발맞춰 외과적 수술 역시 환자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뇌동맥류 조기발건 중요…과도한 우려는 금물
뇌동맥류 치료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는 조기 발견도 중요하다. 파열성 뇌동맥류는 의학 기술이 발전한 지금도 환자의 3분의 1은 사망하고, 3분의 1은 중증장애를 얻을 정도로 예후가 나쁘다.
반면 비파열성 뇌동맥류는 크기가 20~25mm에 달해 뇌신경을 압박하지 않는 이상 전조증상이 전혀 없다.
최 교수는 “뇌동맥류는 60세 이상 유병률이 5%에 달하는 만큼 젊을 때부터 불안해할 필요는 없지만 50~60대에는 한 번쯤 뇌혈관 검진을 받아보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이어 “발견 즉시 무조건 시술이나 수술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위치와 크기, 모양에 따라 위험도가 천차만별인 만큼 전문의와 상의해 치료 여부와 시점을 결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국내 뇌혈관 치료 역량 이미 세계 선도 수준”
지난 2024년부터 1년 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장기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최 교수는 한국의 뇌혈관 치료 역량이 이미 세계를 선도하는 수준에 올라섰다고 평가했다.
높은 의료 접근성과 활성화된 건강검진 덕분에 국내 의료진의 진료량과 수술 건수, 술기 수준은 미국 등 선진국을 앞선다는 설명이다.
실제 과거 우리 의료진이 해외로 연수를 떠났던 것과 달리 현재는 유럽과 중동, 동남아 의사들이 술기를 배우기 위해 국내 대학병원을 찾고 있다.
다만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보완해야 할 과제로 연구 지원 시스템과 건강보험 급여 제한을 꼽았다.
미국 스탠퍼드대는 의사 한 명에게 기구 개발 등을 위한 자체 원내 연구비로 100만 달러(한화 약 14~20억 원) 이상을 지원하는 등 연구 인프라가 탄탄하다.
또 기구 사용 개수나 용량에 엄격한 급여 기준을 적용해 삭감 우려가 큰 한국과 달리 미국은 기구 사용에 제약이 없어 환자 맞춤형 시술이 훨씬 자유롭다.
최재호 교수는 “한국 의료진 수술 실력과 임상 경험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연구 투자 규모 면에서는 아직 미국과 격차가 있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이어 “임상 현장에서도 치료재료와 기구 사용에 대한 제도적 제약이 조금 더 완화된다면 환자안전을 지키면서 수준 높은 맞춤형 치료를 제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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