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과학자 양성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를 끌어올린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공식 종료됐다. 정부가 의대 정원 확대 카드를 구체화시키고 있는 가운데 의대가 아닌 포스텍과 카이스트 등 과학기술특성화대학의 의대 신설 추진 의지 역시 강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의료인력 양성 주체인 의학계와 과학기술계의 관계 설정도 관심사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의사과학자의 임상 복귀 방지 약속을 받아내는 경직된 분위기였지만 최근에는 실제 의대를 설립한다면 어떤 인재를 배출해야하는지 의학계가 조언을 건네 주목된다. 지난 5월 24일 포항시 김정재·김병욱 의원이 주최하고 경상북도·포항시·포스텍이 주관한 ‘의사과학자 양성을 위한 연구중심의대 설립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의학계와 과학기술계, 현직 의사과학자가 만났다. 이날 전문가들은 신경전은 잠시 접어두고 의사과학자를 양성할 의과대학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해법 등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편집자주]
이날 토론회에서 강대희 서울대 의대 미래발전위원장(예방의학교실 교수)은 토론 좌장으로서 대화가 ‘밥그릇 싸움’으로 비치지 않도록 포스텍 의대 및 스마트병원 청사진에 대한 의학계의 진심어린 조언을 유도했다.
포스텍은 ‘기초과학을 하는 의사가 아닌 의학을 아는 공학자’를 양성하겠다며 연구중심의대와 스마트병원 정체성을 밝혔지만 의학계는 의사로서의 기본 자질 구비와 병원 운영이 어려운 현실을 강조했다.
“의사과학자도 의사, 마음 따뜻하고 언제든 환자 볼 수 있어야”
신찬수 한국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협회 이사장(서울의대 내과학교실 교수)은 “의사과학자도 과학자이기 이전에 의사다. 임상으로 복귀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환자를 볼 수도 있다”며 “이왕 의대를 만든다면 좋은 의사를 양성할 수 있도록 만들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는 현재 전국 40개 의대 중 어느 곳을 졸업하더라도 첫날 환자를 볼 때의 역량은 갖춰야 한다고 보고 있다. 추후 41번째 의대가 될 수도 있는 포스텍 의대도 예외여선 안 된다는 입장이다.
신 이사장은 “의대는 기초과목, 임상과목을 가르치다가 최근 나선형 통합교육 등을 실시 중인데, 마음이 따뜻하고 소통을 잘하는 의사를 만들기 위해 인문학 교육에 힘쓰고 있다”며 “언제든 환자와 만날 수 있다고 전제하고 이 교육을 소홀히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더해 교육 과정, 교원 채용과 관련한 현실적 의구심을 제기했다. 그는 “학부 과정부터 특정 목적을 지닌 분야를 따로 만든다는 게 과연 교육적인지 우려된다”며 “현재 포스텍 교원 규모라면 의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임 교수를 200여 명 채용해야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희귀난치질환자 많은 연구중심병원, 경영 역량 제고해야”
이민구 연세대 의사과학자 양성사업단 단장(연세의대 약리학교실 교수)은 포스텍의 연구중심 스마트병원 운영 역량에 대해 고찰했다. 경쟁력있는 대형병원을 세우더라도 적자 극복이 가능할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이민구 단장은 “의사과학자는 희귀난치질환에 대한 치료법을 창출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임상교육 자체를 희귀난치질환자가 많은 곳에서 수준 높게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 유명 연구중심병원의 연간 외래환자는 6만명이고 진료비는 7000억원인데, 건강보험재정에서 진료비로 지원되는 돈은 4분의 1이 되지 않는다. 연간 5000억원의 적자를 내면서 운영하는 셈이다.
이 단장은 “해마다 수천억의 재정 지원을 중앙정부에 계속 요구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며 “포스텍, 포항시 지원 또는 기업 유치 등으로 재정 부담을 감당해야 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임상에서 연구 아이디어 얻어, 의사과학자의 의료기관 겸직 유연화 필요”
배출된 의사과학자가 임상으로 복귀하지 않고 연구에 몸담기 위한 환경 조성이 뒤따라야 한다는 것은 의학계와 과학기술계의 공통 고민이다. 앞서 이를 법적으로 금지시키는 장치 마련 등 강경한 방안이 제시된 바 있기도 하다.
이날 현직 의사과학자로서 참석한 차유진 카이스트 의과학연구센터 교수(방사선종양학과 전문의, 바이오 및 뇌공학과 박사)는 최소 범위에서 의사과학자의 의료기관 겸직을 허용하는 유연한 제도를 아이디어로 내놔 이목을 끌었다.
그에 따르면 현재 연구기관에 종사하는 의사는 임상 업무를 겸하기 어렵다. 의사과학자가 진료만 하거나, 오직 연구만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실제 임상에서 환자를 치료하다가 현대의학의 한계를 느껴 의사과학자가 된 차 교수는 “임상에서 연구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가 많다”며 “연구자에게 의료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케 하고 충분한 영감과 연구 동기를 제공할 수 있도록 배려해달라”고 말했다.
이어 “젊은 연구자들이 단기간에 논문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연구에 쉽게 노출되는데 정량 실적으로 잠재력을 입증해야 한다면 새로운 학문이나 시간이 걸리는 난제에 도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