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비대면 진료 제도화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가운데 ‘화상투약기’ 도입 추진 소식에 약사단체가 결국 폭발했다.
화상투약기는 일종의 약 자판기로, 환자가 기계 모니터를 통해 원격으로 약사와 상담 후 약을 추천받아 구매하는 비대면 진료 시스템이다. 약 10년 전 한 약사가 심야시간 의약품 구입 편의성 증대를 명목으로 개발했다.
이는 20일 열리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서 실증특례 안건 상정을 위한 표결을 앞두고 있다.
이에 전날인 19일 오후 전국 약사 1000여 명이 대통령실 인근 용산 전쟁기념관 앞에 모였다. 이들은 “편의성·상업성에 초점을 맞춘 화상투약기 도입 논의를 당장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이날 삭발을 감행한 최광훈 대한약사회장은 “약 자판기는 본질적으로 특정 기업의 수익창출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며 “심야시간 의약품 구입 편의를 높인다는 취지는 사탕발림에 불과하다”고 지탄했다.
최 회장은 “국민 건강에 관심 없는 자들의 탐욕을 채운 트로이 목마가 약국 문턱을 넘어선 안 된다”며 “산업논리 때문에 국민건강권이 또 위협받는 일을 막아내겠다”고 역설했다.
2011년 정부가 규제개혁을 위해 자양강장제를 의약외품으로 분류해 편의점 판매가 시작됐고, 이로 인해 국민과 청소년이 고(高) 카페인 음료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는 지적이다.
이에 최 회장은 “심야시간 의약품 접근성을 확대하는 목적이라면 규제 완화를 할 것이 아니라 전국 공공심야약국을 확대하는 게 맞다”고 제안했다. 공공심야약국 시범사업은 오는 7월부터 시행된다.
코로나 사투했더니 돌아온 규제완화···약화사고 책임소재 불분명
규제완화 드라이브를 걸고 나선 정부에도 비판이 가해졌다.
이날 박정래 충남약사회장은 “코로나19 유행 시 공적 마스크 판매·자가진단키트를 공급하고 감기약 품절 상황에서도 최일선에서 힘쓰던 약사들은 이번 상정 소식에 참담함을 금치 못하겠다”고 탄식했다.
이어 박 회장은 “국민건강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정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가 부작용 양산이 뻔한 정책을 추진하려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고 날을 세웠다.
또 “화상투약기는 혁신 기술이 아니다”며 “체계적인 사업계획도 기술 집약화도 없는 단순 기술이 무슨 첨단기술이어서 실증특례 적용 대상이 될 수 있냐”고 꼬집었다.
국민에게도 호소했다. 변정석 부산약사회장은 “가습기 살균제·생리대 유해성분 등으로 큰 상처를 겪은 분들이 계시다”며 “의약품은 다른 공산품보다 더 엄격한 관리감독을 받지만 누구도 의약품의 모든 것을 다 안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어 “자판기에 깔린 약으로 약화사고 발생 시 누가 책임을 지겠냐”며 “편의성만 앞세운 잘못된 주장에 귀 기울이지 말고 화상투약기는 건강상 위해와 더 큰 경제적 부담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약사가 개발한 시스템, 10년째 갈등 지속···매듭 추이 주목
한편, 화상투약기 도입을 둘러싼 갈등은 약 10년 전부터 지속됐다.
박인술 약사가 대표로 있는 쓰리알코리아는 화상투약기를 개발해 지난 2013년 인천 약국에 이를 설치했지만 대한약사회의 반발에 부딪혀 약 두 달만에 철거했다.
이후 2016년 화상투약기 합법화를 골자로 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국회에서 폐기됐다. 번번이 고배를 마신 업체 측은 이번 과기부 심의위원회를 거쳐 시범사업만이라도 추진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약사가 개발한 신기술이 약사 단체와 충돌하고 있단 점에서 최근 의대생이 개발한 비대면 진료 플랫폼 ‘닥터나우’와 의사단체 간 갈등 격화와 비슷한 양상이 펼쳐지면서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