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ray 아트 개척 의사 '소소한 일상과 삶 재해석'
국제성모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
2021.12.04 06:56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양보혜 기자] "아름다운 사람을 보면 내면이 궁금하지요. 꽃이나 사물을 볼 때도 어떤 구조를 가졌기에 저리 아름다울까 하는 호기심이 들지요. 이런 남다른 관심이 엑스레이 아트를 하게 된 계기입니다." 
 
국내에서 '엑스레이 아트'라는 장르를 개척한 가톨릭관동대학교 국제성모병원 영상의학과 정태섭 교수[사진]는 진료 보는 날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 양재동 작업실에서 보낸다. 
 
작업실에는 노트북을 비롯해 대형 프린터, 스크린, 전시된 작품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벽에는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유명 작품이 걸려 있다.
 
그의 그림은 드라마는 물론 초·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도 실렸다. 과학과 예술이 융합되면 아름다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인생 황혼기인 53세에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던 정 교수.
 
그를 만나 엑스레이 아트라는 새로운 길을 걸으면서 의사와 예술가로서 삶 등에 대해 들어봤다.  
 
Q. 여러 과 중 영상의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어릴 때부터 무엇이든 손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지금도 진공관 엠프를 만들어 음질 테스트를 하기도 한다. 미술 선생님이셨던 아버지 영향인 것 같다. 아버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하셨다. 고3 때 공부에 소질을 보이는 내게 다빈치처럼 의과대학을 가라고 권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해 6년 동안 부지런히 공부했다. 기계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여러 기계를 다루는 영상의학과를 선택하게 됐다. 
 
Q. '엑스레이 아트'는 무엇인가 
지금은 엑스레이와 컴퓨터단층촬영(CT) 같은 진단장비를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는데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엑스레이가 개발된 1985년에는 뼈나 장기는 물론 꽃과 개도 찍었다. 병을 찾는 용도로 쓰일 때 경제성이 있다보니 용도가 그렇게 굳혀진 것이 아닐까. 나 역시 병원에서 질병 진단용으로만 사용하다가 불현듯 환자 대신 사물을 찍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틈날 때마다 꽃, 나뭇잎 등 주위에서 흔히 보는 사물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엑스레이 사진에 디지털 작업을 더해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고, 작품 수가 늘어나다보니 전시회도 하게 됐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걷다보니 하나의 장르가 됐다. 
 
Q. 작품 제작 과정은 
엑스레이로 촬영한 사진에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더한다. 색이나 명도, 채도 등을 조절하고, 여러 장의 엑스레이 사진을 겹쳐 편집해 감성이나 메시지를 표현한다. 예를 들어 색소폰을 부는 사람을 담은 '오늘을 즐겨봐!'라는 작품의 경우 신체 각 부분을 따로 촬영해 퍼즐 조각을 맞추듯 합성했다. 색소폰의 경우 색을 입히며 편집 작업을 한 것이다. 
 
Q. 현재까지 제작한 작품 수는
100점 가까이 된다. 처음 연 초대전에서 그림이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 이후 개인전을 여는 게 어떻게냐는 권유로 더 공부하고 연구해 작품을 더 많이 제작했다. 1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다. 내 작품이 '태양의 후예' 드라마에 등장하기도 하고, 초·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도 실렸다. 
 
Q. 가장 애착을 느끼는 작품은
(잠시 고민을 한 뒤) '입 속의 검은 잎'을 좋아한다. 이 작품은 요절한 젊은 시인 기형도의 시를 읽고 시상을 형성화한 것이다. 어느 날 우연히 아내의 장미꽃 브로치를 보는데 기형도 시인의 '입 속에 똬리를 튼 채 생을 위협하는 검은 잎'이란 구절이 떠올랐다. 이에 후배 의사에게 입에 브로치를 물게 한 후 엑스레이를 촬영해 작품을 만들었다. 이 외에 '바이올린 위의 선율', '와인과 영혼', '골프하는 사람' 등도 좋아하는 작품이다.
 
"자연 내면의 미(美) 표현 주력, 예술 통해 삶의 여유 갖게 돼"
"젊은의사들, 자기 재생산에 좀 더 많은 시간 투자했으면"
 
Q. 예술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 달라진 게 있다면
과거에는 ‘자연의 미(美)’를 표현하는 데 집중해왔다. 아름다운 외형을 가진 사물 이면에 어떤 구조가 있는지 등을 보여주며 '내면의 미(美)'를 표현하는데 주력해왔다. 그러나 이제부턴 소소한 일상을 관찰하고 거기서 의미를 부여하고 표현하는데 노력할 것이다. 
 
Q. 의사와 예술가의 삶, 괴리가 클 것 같은데
그렇다. 일례로 갤러리에서 9시에 모임을 한다고 가정하면 나는 최소한 10분 전에 도착한다. 오랫동안 병원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화가들은 9시 반, 동양화가는 10시가 넘어야 모인다. 생활방식이 다른 것이다. 의사뿐만 아니라 이공계도 마찬가지다. 철저하게 규정대로 움직이고, 룰을 지키는 것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창의적인 생각이나 융통성을 갖는 여유를 갖기 어렵다. 예술을 하면서 이런 부분들이 바뀌었다.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다양한 주제로 대화하고, 갑작스러운 변화에도 놀라지 않고 수용하고 대처할 수 있는 여유로움을 갖게 됐다. 
 
Q.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전망은
저 역시 위축됐다. 전시도 많이 줄고, 의사로서도 수동적인 자세를 갖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는 코로나19를 이겨낼 것이다. 개구리가 더 높이 뛰기 위해 움추리는 것처럼, 이 시기 동안 힘을 잘 비축한다면 더 큰 도약을 할 수 있다.
 
Q. 마지막으로 후배의사들에게 한마디   
아무리 바빠도 시간은 난다. 그 시간을 어떻게 잘 활용하느냐가 관건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고, 술을 마시거나 게임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다. 개인적으로 자신을 재생산하는 데 활용하길 바란다. 내 경우엔 요즘엔 작품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요리를 하고 커피 로스팅 기계, 엠프도 만든다. 자투리 시간을 잘 이용해 삶을 풍부하고 여유를 만드는 기회로 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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