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외과의사로 사는 의미
이성준 교수(건국대병원 흉부외과)
2020.02.18 10:53 댓글쓰기

[특별기고] 가슴과 등을 짓누르는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통증. 전조 증상 따위는 없는 마른하늘의 날벼락 같은 통증.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하게 만드는 무서운 통증. 실제로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심한 고통. 그로 인해 가족과 지인들이 걱정하고 슬퍼할 여유조차 주지 않는 통증.
 

내가 필드에서 느끼는 대동맥 박리증의 주관적 특징이다.
 

대동맥은 내막・중막・외막 등 3층으로 이뤄져 있는데, 대동맥 박리증이란 찢어진 내막으로 피가 흘러들어가 중막을 길게 찢어내는 급성 대동맥 질환이다.
 

조절되지 않는 고혈압이 가장 흔한 원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말판증후군, 이첨판 대동맥판막, 엘러스-단로스 증후군 등의 유전적 요인과 대동맥 경화 같은 퇴행성 대동맥 질환이 원인이 돼 갑작스럽게 대동맥 박리가 유발될 수 있다. 아무런 전조증상이 없다가 중막이 장축으로 찢어지면서 통증이 유발되는 것이 특징이다.
 

무시무시한 고통이 발생하는 대동맥 박리는 시간당 1%씩, 24시간에 1/4의 환자를 우리 곁에서 과감히 빼앗아간다.


이별에 대한 예고도 없고 환자나 가족에게 이별의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아 더욱 더 매정하고 고약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든다.


질병의 특성이 이러하다보니, 환자는 물론 보호자들을 지켜봐야 하는 외과의사의 마음도 정말이지 편치 못하다.


칼로 생명을 지키는 외과의로서 항상 머리와 손끝으로 최고의 수술을 하려고 하지만 슬픔과 아픔 속에 남겨진 보호자들을 보고 있자면 때로는 이 모든 것들이 너무 가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수술자체가 너무 어려울 수도 있고, 병 자체가 너무 고약할 수도 있으며, 환자가 병원에 도착하지도 못하거나, 병원에 도착하더라도 수술실에 들어가서 찢어진 혈관에 접근할 때까지 시간이 마저 주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때는 매번 괴롭고 고통스러우며 그 어떤 진통제도 효과가 없는 지독한 두통에 시달리곤 한다.


나는 차갑고 매정하고 전혀 인간적이지 않은 질병에 의해 예고도 없이 갑작스런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환자의 손을, 옷소매를, 하다못해 바지 끄덩이를 잡아 물고 늘어지는 사람이다.


이 모든 일은 절대로 혼자서 할 수 없다. 건국대학교병원은 외과 집중 치료실(SICU)은 365일 한결같은 마음으로 밤과 낮, 주말, 연휴와 상관없이 항상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다.

아주 숙련되고 책임감 강한 어시스턴트와 언제나 호의적인 수술실 간호사, 그리고 경험 많은 체외 순환사(개흉 수술 시 심폐기를 관리하는 의료진)와 수준 높은 마취과의 지원이 있어야 가능하다.
 

신기하리만큼 이런 응급수술은 낮보다는 밤, 주중보다는 주말, 그리고 연휴에 발생한다. 응급실에서 CT를 확인한 후 수술을 결정하면 모든 의료진들이 언제나 달려 나온다.
 

대동맥 박리증은 대동맥이 찢어지는 어찌 보면 단순한 병이지만 어느 하나 똑같은 경우가 없다. 환자 개개인의 과거력, 활동 능력 등이 다르고 박리된 범위, 양상이 모두 다르다.
 

모든 것을 고려해 CT를 보면서 개별적인 계획을 세우고 한두 가지 정도 변수를 머릿속으로 되짚지만 수술을 하는 동안 크고 작은 계획 변경은 불가피하다. 이 때문에 수술시간은 짧게는 5시간 전후에서 6~7시간, 간혹 그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경험 쌓이면서 겸손함을 더 느낀다. 회복해준 환자분들에게 오히려 감사하다"
 

하지만 집도의가 느끼는 시간의 흐름은 정말 쏜살같이 빠르다. 대동맥수술을 비롯해 흉부외과에서 하는 수술은 심폐기를 연결하는 준비단계, 주요 수술단계, 심폐기 이탈 및 지혈 등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모든 단계가 하나같이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무리 단계가 가장 힘들고 어렵다. 수술 평가를 받는 느낌이랄까? 이 단계에 들어서면 앞으로 이 환자의 예후가 어떻게 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동맥수술은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되며 거대한 자연을 대하듯 겸손해야 함을 종종 느낀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를 중얼거리며 긴장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단계임과 동시에 주요 수술단계를 한번 되짚어보는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 생각을 하기도 한다. 목이 빠지도록 나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 내 눈을 뚫어져라 보면서 수술결과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 내 입에서 나올 한마디에 가슴 졸이는 사람들. 그들은 ‘보호자’다.
 

이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에 나 역시 수술실에서 빨리 나가 결과를 알리고 위로를 건네고 싶다.
 

하지만 수술이 아무리 잘 되었다고 한들 여러 가지 치명적인 수술관련 혹은 질병관련 합병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단어 선택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환자가 하루하루 회복해나가는 모습이 관찰되면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다. 죽음의 문턱을 같이 넘어서 일까? 의사로서 한 생명을 살렸다는 보람 혹은 뿌듯함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서로의 마음을 잘 알아서일까? 기분만 좋은 게 아니라 심지어 환자가 내 가족처럼 느껴진다.
 

보호자들 역시 너무나 고마워한다. 그러나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내 쪽이다.
 

가끔은 감사를 받는 동안에도 내 마음 한 편엔 먹먹함 같은 것이 존재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결과가 좋지 않았던 환자에 대한 미안함, 안타까움 때문일 것이다.
 

결과가 좋지 않았던 환자에 대한 예의라고 해야 할까?
 

경험이 쌓일수록 ‘겸손하고 또 겸손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이런 의미에서 퇴원하는 환자, 보호자에게 한 말씀 드리고 싶다. “회복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내 마음 속엔 환자와 모든 과정을 꿋꿋이 이겨낸 혹은 이겨내고 있는 보호자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차지하게 될 환자, 보호자를 위한 커다란 공간도 있다.
 

병마와 싸워 이기겠다는 오만함보다는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겸손함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하는 것 같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 혹은 찢어진 혈관에 접근하기도 전에 수술 할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은 환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나는 오늘도 경건하고 겸손하게 환자를 기다린다.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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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민 02.18 17:45
    존경합니다. 보건복지부는 환자를 살리는 수술을 담당하는 외과의사들과 관련 인력들의 처우 개선에 힘써주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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