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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대신 의사 불신 초래 대한민국 '의료감정'
박정연기자
[ 2019년 12월 15일 22시 49분 ]

[데일리메디 박정연기자/수첩] 최근 한 청와대 청원글이 이슈가 됐다. “삶이 파괴됐습니다. ‘의료사고를 전담하는 감정기관’을 설립해 주세요”란 제목의 글이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무릎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낀 그는 고등학교 동창이자 대형 정형외과병원 원장인 의사를 찾아 상담을 받았다. 십자인대파열과 반월상 연골판 파열 등을 진단받은 그는 간단한 수술이라는 말에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수술 후 극심한 후유증이 찾아왔다. 통증과 함께 무릎 뼈가 흔들거리는 슬관절 불안정증을 겪게 된 것이다. 15분 이상은 걸을 수 없게 될 정도로 증상이 심해졌고, 결국 장애 판정을 받았다.
 

그는 곧 소송을 제기했다. 약물치료라는 선택지가 있었음에도 의사가 이를 제시하지 않았고, 이후 수술 후유증에도 의사 과실이 있다는 주장이었다. 후유증 위험성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고 읍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치료법의 충분한 선택지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일부 과실만 인정했다. 의료과실에 대한 청원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은 데는 법원이 대학병원에 의뢰한 진료기록 및 신체 감정결과가 결정적이었다.
 

직접 만나본 청원인의 상태는 좋지 않아 보였다. 거동이 어려운 다리로 계단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자청해서 보여줬다. 모습과 덜렁거리는 다리에서 상당한 불편함이 느껴졌다. 몸의 이상이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만큼 심적 고통도 커보였다.
 

그가 이 처럼 실감나게 몸의 상태를 보여주면서 문제 삼은 것은 대학병원 의사의 의료감정이었다. “다리 상태가 이런데, 의료감정 결과가 도대체 왜 이렇게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의사단체 임원으로 활동 중인 집도의 이력을 의심했다. "유명 대학병원 교수들이면 서로 안면이 있거나 그렇지 않아도 같은 의사끼리 ‘봐주기’가 있을 수 밖에 없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얼마 뒤 그의 사연은 TV뉴스를 포함해 각종 언론에 보도됐다. 놀라운 것은 의사에 대한 청원인의 불신감에 공감하는 국민들이 적잖았다는 점이다.
 

“의사들이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수술을 권유한다”, “끼리 끼리 해먹기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따위 버린 지 오래인 장사치”와 같은 원색적인 비난 등 의사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반응들이었다.
 

언제부터 의사가 국민들에게 이토록 신뢰를 얻지 못하는 직업이었을까. 그런데 외국의 상황은 조금 다르다.
 

지난 2018년 10월 글로벌 여론조사기관 입소스(IPSOS)가 15세 이상 영국인 남녀 1001명을 대상으로 ‘믿음이 가는 직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들은 간호사(96%)와 의사(92%)를 각각 1, 2위로 꼽았다.
 

‘해당 직업인은 진실을 말하는가?’란 질문에 응답자들은 간호사에 대해선 94%가, 의사에 대해선 91%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정치인은 19%, 광고회사 임원은 16%, 기자는 26% 응답률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의사에 대한 국내외 인식이 갈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청원인은 의료감정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들어와서 ‘선생님, 제 무릎 좀 봐주십시오’하면서 다리를 보이려 했더니 ‘아, 됐습니다. 거기 계세요. 저는 서류만 봅니다’라고 말하면서 저지하고 서류를 휙휙 넘기는데···”라며 의사의 고압적인 태도를 기억했다.
 

그러면서 “직접 만져보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불편한 다리 상태를 어떻게 알겠느냐”며 감정결과를 의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의료감정에는 진료기록 감정과 신체 감정 두 가지가 있다. 전자는 말 그대로 서류만을 검토하는 것이고 후자는 필요시 직접 수진을 통해 해당 환자의 상태를 확인한다. 또 신체 감정의 경우 접촉으로 인한 바이러스 감염 위험이 있을 때는 수진을 피한다.
 

청원인에게 이와 같은 두 감정의 차이점과 신체 감정의 유의사항에 관해 물었더니 이에 대해 명확히 인지하고 있지 않았다. 법과 의료 전문가가 아닌 이상 당연하다.
 

때문에 청원인 입장에서는 의사의 언동만이 인상 깊게 남았다. 의사의 언행으로부터 받은 ‘성의가 없다’는 느낌이 곧 의료감정과 의사들에 대한 불신감으로 이어진 것이다. 
 

의사의 언행, 즉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실제로 환자의 신뢰감과 직결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한양대학교 건강과 사회 연구소의 2017년 연구에 의하면 ‘환자가 의사를 신뢰한다’는 의미의 구성요인으로 "의사는 내가 편안하게 얘기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준다"와 "의사는 나에게 친절하게 대한다"가 가장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의사는 건강상태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기술적인 측면은 4개 보기 요인 중 가장 낮은 비중을 차지했다.
 

물론 의사들의 사정도 힘들다. 해외학회, 외래진료, 수술로 가득 찬 대학교수들 일정표를 보면 ‘3분 진료’ 조차 불가능할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개인 연구시간까지 더하면 ‘1분 진료’도 어려운 실정이라고 한다.
 

하지만 의료인력 관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지금 당장 해결될 수 없는 현 상황에서는 의사들이 조금 더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의료윤리학의 메카인 미국 헤이스팅스 센터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에릭 카셀 코넬대 의과대학 교수는 임상 현장에서 의사는 환자의 객관적 질병(disease)과 환자의 주관적 경험을 토대로 한 병(illness)을 모두 살피게 된다고 설명한다.
 

병이란 건강한 상태에 있던 환자가 자신에게 나타나는 이상 징후를 인식하게 되는 주관적인 개인 경험이다. 환자는 이러한 병의 경험을 통해 상처 입기 쉬운 상태가 된다. 다른 직종보다 섬세한 커뮤니케이션이 의사에게 요구되는 이유다.

청원인의 경우도 만일 의료감정을 한 의사가 '친절하게' 대했다면 자신에게 불리한 감정 결과를 받아들이면서 지금만큼 의사에 대한 불신감을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질병을 포함해 세심한 진료 등 어느 하나 빠짐없이 살피는 의사들이 많아질 때 환자와 의사의 신뢰감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mut@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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