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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촛불집회 그리고 집단지성
데일리메디 안순범 대표
[ 2016년 12월 26일 09시 06분 ]

신입기자 때였다. 출입하는 대학병원에 벽보가 붙었는데 눈에 확 띄었다. 5공 청문회로 정치 초년병에서 일약 대선후보로 급부상한 스타 국회의원인 노무현 前 대통령 특강 안내문이었다.

며칠 후 만사 제치고 병원 인근 대학 캠퍼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SNS가 없던 당시에는 TV가 유일하게 그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오프라인 만남에 설레일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첫 만남. 강의실은 그의 인기를 반영하듯 청중들로 꽉 찼다.

사실 노 전 대통령 특강은 기대 만큼의 감흥은 없었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을 상대로 당당했던 모습과 정연했던 논리, 송곳처럼 예리했던 질의를 연상하는 데는 부족하지 않았다. 핸드폰이 없던 시기라 고인(故人)과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추억으로 간직하지 못한 아쉬움이 크다.

20여 년 전 상황을 떠올린 것은 최근 열렸던 최순실 관련 국정조사특위 청문회가 비교돼서다. 출석한 증인들의 뻔뻔함과 비겁함에 곁들어 질문하는 의원들의 답답함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잔영(殘影)을 더 깊이 느껴지게 했다.

최순실 게이트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지 두 달이 넘었다.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 광장을 비롯해 전국 수많은 시민이 거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외쳤다. 친박계가 버텼지만 국회는 압도적으로 박대통령 권한을 정지시켰고 결국 그는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대에 서게 됐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부끄럽고 참담한 상황이 5000만 국민 앞에 현실이 됐다. 헌법재판소가 최종적으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지켜봐야 하겠지만 역사는 훗날 작금의 실정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후안무치(厚顔無恥) 할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고 국가 발전을 몇 십년 퇴보시킨 책임을 망각한 채 뻔뻔한 논리로 버티는 대통령을 보면서 그를 뽑은 국민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됐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

반만년 역사를 살펴보면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는 능력이 우리 국민 DNA 속에 있다고 위안하지만 과연 어둠의 터널을 잘 뚫고 나아갈 수 있을지 암담하다.

기실 우리는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을 경험하면서 국가와 국민이 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었다. 수백명 꽃다운 학생들의 죽음을 희생 삼아 전국민의 의식과 삶의 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시켜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실제로 당시 그런 모습은 여기저기서 목격됐다. 운전 중에 신호등은 물론 정지선을 잘 지키는 차량이 눈에 띄게 늘었었다. 기본을 지키고 절차를 준수하고 다수를 위해 소수의 피해를 감수하는 공리주의 문화가 새롭게 싹트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대한민국은 세월호 전과 후로 봤을 때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권력과 결탁한 부조리와 부패, 책임 떠넘기기, 자기 이익과 생존에 골몰한 이기주의자들이 넘쳐났다.

더욱이 세월호 7시간 의혹으로 지탄을 받았던 박대통령은 보다 엄중한 자세와 의지를 갖고 국정을 이끌어야 했으나 결과적으로 최순실 장단에 놀아난 꼴이 되고 말았다.

그새 대한민국號(호)는 거대한 암초에 부딪혀 좌초, 골든타임을 놓친 세월호와 똑같은 신세가 됐다. 그 배에 타고 있는 5천만 국민들의 운명도 풍전등화의 상황에 직면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전대미문의 이번 스캔들로 외국에서는 한국 기업들의 ‘디스카운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한국의 재벌기업들이 정치권력에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글로벌 기준을 극복하는데 한계가 있는 것으로 비춰졌다.
궁극적으로 이는 단순 기업가치 및 브랜드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국가, 즉 ‘코리아 디스카운트’로 이어질 수 있다.

하지만 반전 상황이 예기치 않은 데서 목격됐다.

해외에서 한국의 촛불시위를 주목한 것이다. 외국 주요 언론은 수백만명의 인파가 운집했고 대통령 퇴진이라는 격한 구호가 외쳐졌음에도 한 건의 사고도 없이 평화롭게 진행된 것에 대해 감탄하고 있다. 한국 하면 최루탄과 물대포, 화염병이 난무하는 시위에 익숙했던 과거와 너무 다르다는 것이다.

급기야 ‘헬(Hell)조선’이 아닌 ‘갓(God)조선’을 외치는 학생들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이번 사태는 또 다른 발전 시사점을 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측면에서 수백만명이 참여한 평화시위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새로운 발현으로 다시금 세계에 한국적인 대중정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다. 광장의 집단 함성이 ‘집단지성’으로 승화돼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광장의 분노와 함성, 촛불에서 한 단계 더 성숙해지고 나아가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방향으로 귀결됐으면 한다. 그래서 촛불의 불씨가 무저갱(無底坑)으로 곤두박질치는 대한민국호를 구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고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다. 

데일리메디 dailymedi@dailyme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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